부활절 설교 마태복음 28:1-10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
해보았지만 부정되어지지 않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실제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창조의 새 질서를 누릴 수 있다.

 

▲ 조광성 목사
송현교회 담임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아니하다’라는 고사성어입니다. 겨울옷을 벗자니 아침, 저녁 바람이 여전히 차갑고, 창문을 활짝 열어 상큼한 봄 내음을 맡자니 겨울의 남은 추위가 사나운 발톱을 날카롭게 돋우고 있어 여전히 그늘진 겨울 구름 아래 웅크리고 지낼 수밖에 없는 봄의 정경을 묘사한 말입니다.

우리가 맞는 봄은 항상 이렇습니다. 그런데 계절의 변화는 막을 수 없어 지금 우리 주위엔 생명의 새로운 기운이 온 누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죽은 듯이 누렇던 잔디가 파릇파릇 달라지기 시작했고 겨우내 얼었던 땅도 온통 죽은 것만 같던 자연에서 다시 생명의 기운이 활기차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봄에 꽃은 피었다 떨어지고 그 낙화와 더불어 새로운 꽃망울을 피워대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인간은 절망에 이르는 병을 안고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절망에 이르는 병이란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고 오차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이기는 폭군이기에 우리 모두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는 방식도 피부색도 차이가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절대 평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도 오늘도 잠시도 쉬지 않는 참으로 무서운 권세입니다. 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오열하고 절망하고 허탈해 합니까?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를 찾아와서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석가모니는 그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들을 살려줄 테니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온 집을 찾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해 오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석가모니가 말하기를 “그렇지요! 죽음이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발길을 돌렸답니다. 

석가모니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절망하고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은 해결하셨습니다. 요 11:25-2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 부활은 역사적이며 실재적인 사건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유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을 우선으로 놓으려는 자기 교만입니다. 

어떤 꼬마가 학교에서 이제 막 구구단을 배워 와서는 집에서 할아버지 앞에서 자랑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하도 기특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3×4는 뭐지?” “12예요.”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6×7은 뭐지?”, “42요” 아이는 너무 쉽다는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어려운 문제를 냅니다. “그러면 13×12는 뭐지?” 그러자 아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할아버지,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어요. 할아버지는 바보 같아”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직 구구단만 배웠기 때문에 구구단 밖에 있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성경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그를 평소에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 새벽같이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천사의 모습이 번개와 같고 그 옷은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의 마태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을 쓴 마가도, 누가복음을 쓴 누가도 요한복음을 쓴 요한도 한결같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그 당시의 직업이 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당시 총독이었던 데오빌로에게 자세히 전합니다. 이 사실을 과학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나 분명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 사실 하나만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부인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해서 숨겨놓고 부활했다고 거짓 주장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예상한 빌라도가 무덤 앞에 파수꾼을 세워 지키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 주장도 어불성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실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환상을 한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닙니다. 12제자를 포함해서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장소와 시간이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무덤을 찾아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시체를 안치하였을 때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사람들이 확인하였습니다. 그런 실수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 해보았지만 부정되어지지 않는 것은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며 실제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지구의 작은 도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부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 부활은 증거자의 삶을 사는 이유

8절에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이나 놀라운 소식을 접하면 얼른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당연한 마음입니다. 우리도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절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지만 TV에서 부활절을 알리는 뉴스는 아주 잠깐 지나갈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이 부활절인지 조차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부활절 달걀입니다. 

옛날에는 부활절 달걀을 만들기 위해서 싸인 펜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달걀에 색소가 그대로 번져 먹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형형색색의 계란 포장지들이 시대감각에 맞춰 나오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포장지로 달걀을 씌웠느냐가 아니라 달걀을 통해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우리 이웃들에게 전했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빨리 떠나 지체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이 기쁜 소식을 ‘빨리 떠나’ 지체하지 않고 전하는 증거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 

18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매년 봄이 오면 다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새로운 잎이 피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동면하던 곤충이나 동물들도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계절입니다. 이로써 부활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식물이 싹이 트고 자라고 하는 과정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사건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 <아기 번데기의 슬픔>에서 아기 번데기가 울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의 울음은 자기 엄마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껍데기만 남기고 죽어간 엄마를 그리워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개미의 도움으로 저기 멀리서 멋지게 나는 나비가 자기들의 엄마임을 발견하게 되고 이제 자기도 곧 엄마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일반계시의 의미에서 부활을 접근한 것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은 번데기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새로운 창조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아이들에게 부활을 설명하기 위한 동화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당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키던 안식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로 바꾸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어린 계집 아이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도다”라고 외치며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기념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부활의 사건이 바로 새로운 창조의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창조의 날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모든 권세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살인하고 죄를 범했던 사람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는 모습은 과연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을 목격한 파수꾼들이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했을 때 장로들과의 의논에서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돈을 주고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아질 수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형광등 불빛은 우리가 막을 수 있어도 태양빛을 막을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역시 창조의 새 질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개신교인이 주민 모두가 천주교를 믿고 있는 한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선량한 천주교인 주민들은 모두 다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이었기에 그들의 교리에 따라 금요일에는 붉은 고기인 쇠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새로 이사 온 개신교인이 금요일에 스테이크를 바비큐로 구워 먹기 시작하자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매주 반복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한참을 얘기한 끝에 개신교인은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다음 일요일 미사에 개신교인은 신부를 만났습니다. 신부는 그에게 성수를 뿌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너는 개신교인으로 태어났노라. 너는 개신교인으로 자랐노라. 하지만 너는 이제 천주교인이니라.” 이렇게 해서 그는 천주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둘러앉아 생선 요리를 먹으려는데 천주교로 개종한 집에서 쇠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항의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로 개종한 개신교인은 마당에서 쇠고기에 소금을 뿌리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는 소로 태어났노라. 너는 소로 자랐노라. 하지만 너는 이제 생선이니라.”

부활의 아침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개신교도가 천주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소가 생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빨리 달려 나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해야 합니다. 

더들러스 베도라는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의 등록교인이 된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피아노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피아니스트라고 불리지 않는 것과 같다.” 가끔 가다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학교종이 땡땡땡”을 친다고 다 피아니스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끔 교회에 들락거린다고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 산 믿음, 부활의 믿음을 가진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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