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군 군목으로 사역하는 김효석 대위 -아프간 파병 실전 경험 통해 ‘자유와 평화’ 실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 희생할 때, 누군가가 피를 흘려서
오늘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종교 구분 없이 병사들 하나님의 사랑과 상담으로 대할 때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이들 있어 기뻐 -삶으로 전도하는 현장

한국계 미군으로서 한국의 좋은 문화 경험 주고자 경복궁, 한옥마을, 비무장지대 투어

 

▲ 김효석 목사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 희생할 때, 누군가가 피를 흘려서 오늘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용산 미군부대 내에서 만난 김효석 군목(대위, 48세)은 2011년, 2013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와 가즈니 지역에 1년씩 파병을 나갔었다. 그때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함 속에서 다시 한 번 ‘자유’, ‘평화’에 대해서 절절하게 배웠다.
 

●● 고난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김효석 목사는 신학(성결대 학사, 서울신대 석사)을 전공하고 2002년 미국 피츠버그 주립 대학교(TESOL 교육학 석사), 보스턴 대학교(예배학 석사)에서 공부했다. 공부를 했지만 명확하게 진로를 결정할 수 없어서 갈등하던 중에 2007년 한국에 들어와서 시간강사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 김효석 목사가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서 제가 제자훈련한 중위에게 세례를 주고 있는 모습.

그런데 그때 그에게 인생의 획을 긋는 한 사건이 찾아왔다. 건강하던 아내가 집에서 기절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에 당장 미국으로 가서 의사를 만나보니 나팔관 쪽의 암이 의심된다며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신이 번쩍 났다.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그런데 한 선배 목사가 ‘무릎 꿇고 회개하라’고 단호하게 조언했다. 원래 온화한 분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봤다. ‘사모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다.’

김 목사는 친구목사 10명을 병원으로 요청, 수술하는 아내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목회자들은 3시간 반 정도의 수술시간 동안 함께 기도해주었다. 서로 간절히 하나님의 손길을 덧입혀달라고 기도했다.

드디어 백인 의사가 환하게 웃으며 나왔다. ‘good news’라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암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정말 좋은 소식을 들려주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목회의 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아내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확신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에 흔쾌한 마음을 갖게 했고, 동반자로서 마음을 다지는 기회가 됐다.

그 이후 군목이 되기 전에는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탕진하고 탕자의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100% 헌신하게 하셨다.

●● 꿈에도 생각 안 한 미군 군목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길을 가기 원하실까?’

김효석 목사는 구체적인 사역의 길을 놓고 40일 기도를 시작했다. 그 즈음 미국 남침례회 소속으로 군목하는 선배 목회자로부터 군목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군종 생활을 했던 김 목사로서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역이었다.

그러면 어떤 길인가. 해외선교? 일반 목회? 그것도 아니면 군 선교? 자신의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39일째까지. 그리고 드디어 하루를 남겨놓은 그날 하나님은 꿈을 통해 사역지를 보여주셨다.

‘제가 미국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가슴에는 KIM이라는 제 성이 보였고, 왼쪽 가슴에는 USA ARMY(미국 군인)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습니다.’

부르심의 확신을 갖고 김 목사는 순종했다. 보통은 4개월이 되면 당락이 결정되지만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뒤늦게 온 케이스라 서류 준비만 해도 10배 정도 많았고 복잡했다. 경쟁률 또한 몇 십대 1이 될 정도로 높았다.

미국 군인이 될 줄 몰랐던 김 목사는 2009년 4월 미국 군목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해 9월 기초훈련에 들어갔을 때 꿈에서 보여주신 그 광경과 맞닥뜨렸다. 자신이 미국 군복을 입고 미군들과 함께 있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확인했다.

▲ 아프간 파병 중 사방 6군데로 나누어져 있던 중대중 한 곳을 방문하여 병사들과 함께 한 김효석 목사

2011년, 2013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와 가즈니 지역에 1년씩 파병됐는데, 참으로 참혹했다. 특히 칸다하르는 한국인이 IS에게 테러당해 목사가 사망한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너무도 처참했다. 초등학교 아이가 학교도 가지 않고 흙을 나르는 모습, 아이들과 여인들은 사람으로서 가치는 찾아보기 어렵고 노동하는 한 개체로 취급하는 상황이었다.

파병나간 군인들은 생사를 오가기 일쑤였다. 병사들은 작전에 투입됐다가 환자로,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들도 일어났다. 김 목사는 그들을 맞이하면서 같이 아파하고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군목으로서 기도와 성경 공부, 방문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한다. 전쟁통에는 신의 존재에 대해 더 실감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더 깊은 위로를 원한다.

파병 나가기 1년 전부터는 실전에 대비해 훈련을 많이 하지만 그런데도 죽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때가 힘든 한 순간이다.

●● 종교 상관없이 사랑으로 대하는 군목

2014년 6월부터 1년간 동두천의 수색전차대대에서 주한미군 군목으로 활동하다가 임상목회 교육에 선발되어서 1년간 군장학금으로 미국에서 교육받고 다시 2016년에 용산 주한미군 부대 소속 원목으로 2년여 동안 사역하고 있다.

한국계 미군 군목으로서 애로사항은 무엇일까.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유학생이나 이민자로 있다가 군목 된 지 3년간은 문화 차이 때문에 어려웠지만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국가, 인종, 종교가 달라도 사람은 모두 비슷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의 신분으로서 군목이지만 이 부대 내 군목(Chaplain)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신자들을 돌보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특히 김 목사는 전투 지원 병원 원목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기독교인이 40% 정도로 가장 많지만 가톨릭 신자나, 유대인, 불교인, 힌두교인, 무슬림이든 어떤 종교인에게도 종교에 상관하지 않고 병사들을 돌본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 한국식으로 개종시키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다. 불교신자에게도 한결같이 평등하고 따뜻하게 대하며 그들의 종교를 존중한다. 지금도 절에 다니냐고 물어서 옛날에 다녔다고 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해도 되겠니?’를 물어서 허락을 받고 소개한다.

김 목사의 직급이 대위임에도 모든 병사들에게 사랑을 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또한 말로가 아닌 진정으로 삶 속애서 사랑하게 될 때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고 싶다”는 고백을 듣게 되고, 이때 김목사는 주저없이 주님을 소개한다.

주일에는 전통교회 예배, 루터란 예배, 병원 예배 등 5가지의 예배가 있다. 평택이나 성남 등 여러 지역의 미군들도 참석하고 싶은 예배에 참석하기도 한다. 한국 군목은 육해공군 합해서 245명 정도라면 미군은 육군 군목만 1500명에 달할 정도로 군목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상황이다.
 

●● 경험 속 진정으로 대할 때

군목 사역 중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상담’이다. 자살을 생각했거나 계획에 옮긴 이들이 적지 않다. 고생을 모르고 들어와 군인의 엄격한 규율대로 생활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미군도 조직이나 책임감, 팀워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군목과정에서는 심리학, 상담, 신학 등을 필수로 깊이 공부하는데, 환자들을 2천명 이상씩 만나 임상실습을 해야 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김 목사는 일주일에 한 번은 자살 시도자들에게 정신과 상담을, 금요일에는 알코올 중독자 상담을 한다.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김 목사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다가간다. 불교가정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초등학교 때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을 했는데 사고로 큰 형이, 알코올 중독으로 둘째 형이 유명을 달리하는 아픔을 그들과 때로는 공유하기도 한다. 아픔을 경험한 공통분모가 있어서 그들이 마음을 내놓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상담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진심으로 날 사랑하는가’이다. 그것을 알면 문제가 있을 때 찾아온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김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백인 병사가 있었는데, 러시아 여자와 결혼 후 아이가 팔삭둥이로 태어나 호흡에 문제가 있어서 인큐베이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생사를 오간다며 중대장이 도움을 청해왔다. 상담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백인 병사는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니? 들어줄게’라고 말했더니, ‘내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 죽으면 나는 살아갈 소망이 없다’고 했다. 신앙에 대해 물어보니 옛날에 하나님을 믿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그래서 김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부르시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 역시도 ‘사실 나도 그 마음’이라고 말했다.

두 시간 동안 그와 상담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중대장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기적이 일어났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전화였다(이 이야기를 하는데도 김 목사는 눈시울이 불거졌다).

김 목사를 본체만체했던 그 백인 병사는 다음날 김 목사에게 달려와 ‘고맙다’고 진심어린 감사를 표했고, 그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고백하며 또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알코올 중독 병사에게 ‘돌아가신 내 형님을 난 지금도 보고 싶다. 너희들은 늦지 않았다. 다시 신앙으로 돌아와라. 인생은 참으로 보람있는 것이다’라고 진심어린 얘기를 해주면 그중에는 예수를 다시 믿고 싶다, 세례 받고 싶다며 신앙으로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다.
 

●● 급변하는 남북 상황의 기도

남북한 상황이 급변하는 것에 대해 묻자 김 목사는 “북미 대화가 잘 되기를 바라고, 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를 많이 한다. 미군들 역시 한국이라는 아름다운 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니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상황이 급변하니 일희일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유민주주의가 담보된 평화의 나라로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 군목으로서 김 목사에게는 미군들이 한국을 더 잘 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에도 마음을 쓴다. 토요일에는 한국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경복궁, 민속촌, 한옥마을, 한국교회, 비무장지대 등 기회가 닿는 대로 그들이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 와서 사역하면서 한국교회의 초청으로 간증할 기회가 있으면 늘 나누는 얘기가 있다. ‘내 마음대로 잘 살아가기 위한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를 늘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 되자.’

오는 7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김 목사는 오늘도 그런 마음자세로 자신을 다스리고, 병사들을 사랑하기에 몰두하는 한 지체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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