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 승 호
홍성사 편집팀

고등학교 1학년 때 종교 수업 시간. 하루는 각자 준비해온(주워온!) 돌멩이를 책상에 올려놓고 묵상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묵상한 내용을 앞에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뜻밖에도 내가 제일 먼저 지명되었다. 남 앞에서 말하는 게 유난히 서툰데다 곧잘 얼굴이 빨개지는지라 몹시도 당혹스러워하며 중언부언, 나름 느끼고 생각한 바를 어찌어찌 이야기했다. 돌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한, 매우 인상 깊은 기억이다.

이후 영어선생님인 시인 박희진(1931-2015) 선생님 댁에 더러 가 뵈었다. 늘 문자향서권기 가득한 거실 한쪽에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탁자 위 접시에 놓인, 탐스럽고 예쁜 자그마한 돌들이다. 선생님은 이 돌들에게 거의 매일 물을 주셨다. 아니, 화초도 아닌 돌에 물을?

아닌 게 아니라 물을 머금은 돌은 훨씬 생기를 띠어 보였다. 자박자박 물에 잠긴 돌은 표면의 물기가 차츰 말라가면서 ‘같지만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어디선가 눈에 띄어 일상의 공간에까지 함께하게 된 돌들을 바라보시며 선생님은 어떤 생각들을 시어로 다듬어내셨을까?

돌과의 좀 더 특별한 만남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박두진(1916-1998) 선생님의 시집을 만들면서다. 한국 시사(詩史)에서 ‘참시인 중의 참시인’으로 손꼽히는 그를 우리는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우리 근현대사의 격변기, 시대의 암울한 고뇌 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형상화한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쉽고 명료한 시어로 쓰였지만 내겐 다른 시인의 시들에 비해 선뜻 다가가기에 왠지 거리가 있었다. 하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첫 단원에 소개된 시 ‘3월 1일의 하늘’ 외에는 그의 시에 시선이 가지 않았다. 대학 입학 전까지 그토록 많이 치른 국어시험의 지문에도 그의 시는 한 번도 제시된 적이 없었다. ‘해’를 알게 된 것은 지금은 목사님이신 가수 조하문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박두진 선생님의 방대한 시 가운데는 놀랍게도 수석시(水石詩)가 300여 편이나 되는데, 그의 시세계에서 수석의 의미는 각별하다. 수석을 통해 그는 인간과 삼라만상의 근원에 더 가까이 다가가 성찰하게 되었고, 그 궁극에 존재하는 절대자의 음성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고 극복하며 ‘신 앞에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서기를’ 희구했다. 그의 제자인 시인 신대철 선생님은 “수석이 신의 시라면 수석시는 인간의 시”라고 하셨는데, 그 특별한 수석, 곧 돌들에는 어떤 힘이 있고, 어떤 세계가 집약되어 있을까?

박두진 선생님의 수석시 가운데 내게 각별하게 다가온 ‘자화상’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돌과 돌돌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 그러다가 분노, 회의와 불안, 고독, 절망, 그리고 사랑이… 끝없는 뉘우침과 기다림, 갈망, 양심과 정의, 지성이, 진리와 평화와 자유가, 겨레가 나를 두들긴다.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끝없는 아름다움/ 예술이 나를 두들기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신의 시’에 깃든 말씀으로 두들겨지는 일상 속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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