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운전사의 현장 이야기 (67)

▲ 이해영목사
샘물장애인
복지회대표,
샘물교회 담임

오늘 딸에게 반가운 전화가 왔다. 휴가를 잡으려고 하니 날짜를 맞춰 가족여행을 가자는 거다. 작년에도 딸의 도움으로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올해도 여행을 같이 가잔다.

사실 딸이 자기 인생을 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세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닌 끝에 졸업했다. 꿈에 그리던 실용음악과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입학을 포기하고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선배들의 권유로 피부미용을 전공했다. 학교 졸업 후 취업했지만 그것도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다.

일이 너무 버거웠다고 했다. 분장을 위해 촬영장에 가서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지쳐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약한 몸으로 더 이상 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 그만두었었다. 그 후 마음을 잡지 못해 밤늦도록 컴퓨터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부모로서 해줄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장애인사역을 하면서 학원 보내달라는 것도 들어주지 못한 이 아빠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래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진짜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리라 믿으며 말이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가슴이 탔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밤늦도록 게임할 때도 기다리며 기도했다.

그런 시절을 보낸 후 마음잡고 공부를 시작하더니 무섭도록 공부에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공무원 시험을 염두에 두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영어공부를 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인데 영어가 어느 정도 되니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학원에 갈 수 없으니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정말 열심히 공부해 9급에 합격하더니 이어서 7급에 도전해 합격했다. 공부하면서 자신감이 들더라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한 딸이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말할 때 기다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실 나 역시 청소년기에 부모님을 아프게 하면서 보냈었다. 여자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일당이 천오백 원 하던 시절 어머니가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건만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가출하며 등록금을 모두 탕진한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었다.

청년기에는 술독에 빠져 살 때도 있었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몇 번인가 극단의 선택을 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아 서울에서 전북 익산까지 무작정 걸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고 싶었지만 그런 것으로 인생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멍들대로 멍들어갔지만 이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을 외면한 채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갔다.

장애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내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해 줄 때 기뻐하며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기쁨이자 행복인 것을 알았을 때 세상에서 나 같이 행복한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언젠가는 내 아들이 돌아오리라 믿었다고 했다. 그 시간이 힘들었지만 아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우리 주님도 여기까지 참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나를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기다린 어머니와 이 죄인을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리면서 돌아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기다려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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