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43] 사제 왕 요한_ 55

살라딘은 기독교에게 1099년 빼앗긴 예루살렘을 1189년 탈환한
이슬람군 지도자였다. 그의 군사 지휘 능력은 탁월했다.
90여 년 만에 예루살렘에 복귀한 이슬람은 살라딘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다.


 

▲ 십자군 전쟁은 잔인했다. 사진은 영화 ‘킹덤 오브 해븐’의 한 장면.

“왜 웃으세요.”

“웃을 수 밖에요. 유차홍 주교님, 주교님이 로마제국이 버린 네스토리우스파니까 말을 해 봅니다마는 저 사람들 십자군 깃발 든 사람들 대다수가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군요. 내 할아버지 때 우리 가정은 마인츠에 살고 있었는데 1차 십자군보다 먼저 출발한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 우리 도시에 도착했어요. 그들은 목표가 유대인 학살이었죠. 1095년 루앙을 지나면서 유대인 죽이기를 시작하더니 1096년 퀼른을 지나면서 닥치는 대로 우리 유대인들을 죽였어요. 우리 고장 마인츠에서는 1096년 5월 26일 ‘마인츠 대학살’로 1천명의 유대인을 죽였어요. 일부 생존자가 주교관으로 피했는데 거기까지 따라와서 기독교로 개종을 요구했는데 이를 거부하자 다 죽였어요. 개종 거부 유대인 학살, 시너고그(sinagoge, 유대인 교회당)를 불태우고 무려 한 달 동안을 라틴 지역을 돌면서 학살을 계속했지요. 학살뿐 아니고 귀중품 도둑질, 여인들 겁탈, 성지 탈환을 위하여 예루살렘 간다는 명목으로 여행길에 먹고 살기 위한 재산 착취 등을 하면서 유대인 개종을 이유로 삼았어요. 우리 가족은 겨우 콘스탄티노플까지 와서 1백여 년 동안 살고 있는데 어제 오늘은 저들 프랑크 십자군이 그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하는 짓을 보게 되네요. 십자군이니까 자기 나라 수도요, 1천년 동안 자랑하는 기독교 최고의 도시를 박살내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저들 로마 교황 군은 사탄의 앞잡이라 하겠죠. 여러분은 내 집에서 며칠 쉬다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세요. 저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더 나누자고 애쓰십니까.”

유차홍 주교는 유대인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때 유대인 노인이 또 말했다.

“지금 밖에 나가면 위험하오!”

“그래도 어찌합니까? 우리 일행이 낭패를 당했으니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야 하고, 저 건너편 수도원 방화터에 시체가 있다는데…, 동료의 시신이라도 수습해야죠.”

“그러기는 하오만…, 시신의 신원 확인은 했습니까?”

“아니오. 여기 이 사람 요하난이 확인했어요.”

“아닙니다, 주교님. 확인은 아니고 불구덩 안에 여럿의 시신이 있었어요. 우리 바르바스 장군이 맞다는 느낌이….”

“요하난! 바르바스 시신을 본 것은 아니란 말인가요?”

“네, 주교님. 그러나 바르바스 같았어요. 분명해요.”

“여러분, 지금 밖에 나가지 마세요. 내가 이곳 관리와 연락을 취해 보겠소이다.”

약탈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수천을 헤아리는 시민들 중에는 재산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신 로마, 새 로마,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콘스탄티노플을 뒤로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군사들 중에는 다른 이방지역과 전투를 하고 승전하여 늘 통과의례로 있어 온 전리품 챙기는 일이 있는데 전에 비하여, 가장 짭짤한 전리품을 챙겼다고 농지거리 해가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럽고 추악한 로마제국 십자군의 자화상이 되었음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십자군은 단순한 침공, 또는 약탈이 아니었다. 소피아 예배당을 비롯하여 그 많은 기념 교회당,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불러들인 장본인 콘스탄티누스의 최대 업적인 교회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맷돌로 갈아버리듯이 파괴하고 있었다. 질투였을까? 교회의 역사가 담긴 조각품, 건축물 등 마치 프랑크 유럽은 시심이라도 하듯이 짓밟고 있었다.

이 현장을 지켜본 동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인 니케타스 코니아테스(Nicetas Chonites)는 콘스탄티노플과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을 비교하면서 차라리 이슬람의 살라딘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살라딘은 기독교에게 1099년 빼앗긴 예루살렘을 1189년 탈환한 이슬람군 지도자였다. 그의 군사 지휘 능력은 탁월했다. 90여 년 만에 예루살렘에 복귀한 이슬람은 살라딘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다.

“무슬림은 예루살렘에 현재 살고 있는 모든 민간인은 한 사람도 위해를 가하거나 재산에 손을 대지 마라!”

살라딘의 군령을 받은 예루살렘 점령군들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했다. 전쟁에 이긴 군이 전리품 챙기는 것은 기본인 중세기였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는 기독교인들은 성한 몸으로 떠날 수 없다. 재산도 욕심내서는 안 된다. 병신 된 몸으로라도 목숨이 붙어서 쫓겨나기만 해도 천운이 따라준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90여 년 전 1099년 기독교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살아남은 이슬람이나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다. 어린 아이는 물론 아이 밴 여인들도 모조리 죽였다는 전언이 있다. 당시 예루살렘 거리는 피바다가 되어서 장화를 신어야만 다닐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또 일설에 의하면 너무 과장된 이야기라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십자군이 점령했을 때 저지른 흉악한 행동을 알고 있는 이슬람 군사들은 살라딘 술탄의 명령에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을 때, 술탄은 주민들에게 말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들이여, 놀라지 마시오. 여러분 중에 이슬람과 같이 살기 싫어서 떠날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천천히 처분하여 떠나시오. 살라딘의 군사들은 여러분의 인명과 재산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눌러 살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처럼 살아가도 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이웃이 되어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살라딘은 그가 살고 간 뒤 8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슬람은 물론 그를 아는 기독교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8백 년 전 살라딘 술탄이 살았던 평범한 가옥을 볼 수 있다.
유대인 노인이 전하는 니케타스 코니아테스 원로원 의원의 살라딘과 4차 십자군과의 비교 이야기는 유차홍 주교에게는 또 다른 충격의 내용이었다.

다음 날부터 유차홍 주교와 요하난은 그들 일행을 찾기 위해서 아직도 전리품 도둑질이 끝나지 않은 도시들을 기웃거렸지만 어느 누구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불타던 수도원 주변을 기웃거렸으나 바르바스나 이수아의 시신을 구경도 못했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다른 일행들도…. 유대인 노인의 부탁을 받은 주민들이 십자군들과 대화를 해보았으나 수도원 내 분쟁으로 콘스탄티노플 수도원과 수녀원 사람들은 물론 십자군의 희생까지 있었고, 희생자들이 불속에 있었기에 신원확인도 힘들어서 가매장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이 파산을 할 지경인데 한두 사람 신원확인 차 다니는 것은 당분간 어렵다고 했다.

불바다가 된 콘스탄티노플, 세계인이 그리워하던 도시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지금 유차홍과 요하난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했다. 유차홍은 충격으로 몸이 아프다고 유대인 노인의 지하 벙커에서 눕고 말았다. 난처해진 요하난을 유다인 노인이 불렀다.

“요하난 수사님, 당신 유대인이시지?”

요하난은 느닷없는 유대인 노인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는 모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여인과 페르시아계 부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가문 출신임을 자부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네, 그러나 저는 페르시아 크데시폰 기독교 사제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어머니 사리아나와 나의 자랑스러운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신앙을 본받고 있습니다. 특히 하늘의 별 바닷가 모래를 한 가문으로 지켜주신 아브라함 할아버지 사상이 좋아요.”

“아, 아! 내가 묻는 말에 긴장하지 마세요. 나는 요하난과 유차홍 주교를 돕고 싶어요. 또 나는 십자군 이전부터 기독교의 박해 속에서 살아온 유대인이지만 지금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내 집에서 며칠 쉬면서 소경 제집 닭 잡아먹기라더니 십자군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하는가를 살피다보면 실종된 동료들이 어디선가 나타날 수도 있겠죠.”

“네, 할아버지. 감사해요.”

콘스탄티노플은 라틴계 사람들 차지로 변했다. 기득권 가진 자들은 제대로 재산을 챙길 수도 없으니 빈손으로 유랑의 길로 나섰다. 한 주일 넘도록 분탕질을 하다가 일단락 지은 십자군과 베네치아 대표들이 모였다.

콘스탄티노플 새 황제를 정하는 정치 행사였다. 그들이 선택한 인물은 프랑드르의 보두앵이었다. 보두앵은 하기아 소피아 대예배당에서 역대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들처럼 대관식을 올렸다. 대관식 후 황궁으로 모셔진 보두앵은 역대 로마 황제들이 앉았던 옥좌에 앉았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사제 토마스 모로시니(Thomas Morosini)가 콘스탄티노플 신임 총대주교가 되어 대주교좌에 올랐다. 동로마식으로는 로마 교황보다 상위 직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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