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修德)은 주로 道家(노자의 문하)에서 사용하고, 수도(修道)는 노자, 공자 가문은 물론 주로 한국의 전시대 선비들이 사용하는가 싶고, 수행(修行)은 佛家에서 사용하는 구도를 완성해가는 전 과정을 통해서 수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수행은 분명히 구분되지만 수덕과 수도는 불분명하다. 필자가 대강 구분하고 있는 어휘다. 세 가지 모두 거의 동일한 어휘이지만 “수행”은 좀 구분된다. 몸동작을 구체적으로 가다듬는 행위절차이다. 마음으로, 추상과 관념 상태의 교훈일 뿐이고 몸이 뒤따르지 않으면 대개 “위선”으로 마감된다.

그러나 부처 집의 “수행”은 다르고 또 엄격하다. 동작 하나, 또 하나의 몸짓을 통해서 인간을 만들어간다. 기독교의 육화(肉化) 또는 성육신(成肉身)과 가까운 어휘이다.

예수께서 날더러 주여, 주여 할 것이 아니라 나무는 모름지기 그 열매로 구분한다는 뜻의 말씀을 주셨으나 기독교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다, 충만한 성령께서 내 몸 가득히 계시며 나를 지배하신다, 고 말은 하면서도 그 몸이 따르지 않으니 위선이 되고 만다. 아마, 위선자가 많기로는 기독교가 어느 계층과 비교해도 더 많지 않을까 한다.

성경말씀과 구원의 교리를 안다고 해서 내가 예수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을 예수께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몸을 주께 내놓지 않았기에 기독교의 구세주는 아직도 이 땅 위에 오시지 못하고 계시다는 논리 앞에 기독교 사람들은 정직한 답을 해야 한다.

불교 집에 소신공양(燒身供養)이 있다. 자기 몸을 태워서까지 수행의 과정에서 탈락하고 싶지 않은 구도자의 결단이다. 소신공양을 말하면 입방정 기독교 신자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자기 몸을 불사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이다.

그러나 입으로만 중얼거리고, 자기 몸이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가 필요할 때 나(너)를 사용할 수 없는 위선자보다는 소신공양을 해서라도 믿음의 경지를 확보해야 한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하나님은 그 음성이 너무나 세미(細微)해서 땅바닥에다 귀를 바짝 붙이고 들어야만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어릴 때부터 배운지라 나이 70살이 넘었을 때도 하나님의 음성을 꼭 들어야 할 때는 땅바닥에 엎드려 귀를 지표면에 바싹 붙이고 들으려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겸손하고, 무릎 꿇을 줄 아는 자가 은밀한 가운데서 들을 수 있다는 교훈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보다 철이 든 기독교 신자가 그리운 때가 어디 있었나? 오늘을 사는 신자들아, 정신차리고 지금 내 몸을 예수께서 편안히, 그리고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는가를 살피고 서둘러서 내 몸을 다스리고, 다듬어서 하나님 앞에 예물(제물)로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예수의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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