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아직도 구약의 형식을 벗지 못했다. 구약 막바지인 엣세네, 바리새, 사두개, 열심당 식 수준으로 메시아를 만나지 못한 교회(신자)가 대략 80~90%는 된다. 메시아 예수를 맛본 사람(신자)도 구약 속에서 모형(형상)의 그림자 수준의 메시아를 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70인경 수준의 구약이해가 된 유대인 학자 필로나 오리게네스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신약의 예수를 설사 만났다고 해도 헬레니즘, 또는 영지주의 식(Gnosticism)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일 것이다. “십자가 예수”는 말로는 들었고, 교과서 식 교육을 받았으나 육화(肉化) 단계에 오르지 못하면 아닌 것이다.

계몽기적인 검증이 없어서라고 할까, 아무튼 심각한 현실적인 난처함이 있다. 한국의 고대 신앙의 흐름을 따르는 운명론적 이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한 예를 들면, 바울의 의인의 믿음, 믿음으로 얻는 의, 바울의 로마서 3장 ‘믿음’이라는 어휘는 계시어 해석을 해야 하는데 세속어 해석으로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니까 실체와의 만남은 비껴가버린다.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라고 했을 때 ‘세속어’는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하신 것을 믿느냐, 의 뜻이지만 ‘계시어’ 해석은 “예수께서 나와 함께 죽으셨고, 함께 살아나시고, 지금 현재 내 안에 계시며 내 인생을 살아주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말한다.

다시 또 말하면 비울의 믿음은 내가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를 믿는다고 처리하면 추상적인 상황으로 끝나는 함정(사단의 계략)이 도사리게 되고 만다.

사단은 우리 인간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살아있는 현재”가 되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냥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냉혹한 신앙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대속, 대신 속량이란 내 생명을 담보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고 “믿습니다”를 공수표처럼 남발하면 안 된다. 신자가 예수와 십자가 지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관계의 기본형식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경험하는 절차를 밟으면 신자가 세속인들 앞에서 얼마나 무섭고 절실한 존재인가를 안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나 심지어 집권층까지도 1천만 명의 그리스도인을 마치 종이호랑이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종이호랑이가 아니라 역사와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감독관임을 보여주는 한국교회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2019년이 되도록 계획을 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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