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김교신과 그 시대의 인물들’ 학술대회 개최

▲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만열 박사)는 ‘김교신과 그 시대의 인물들’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만열 박사)는 11월 10일 오후 2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소예배실에서 ‘김교신과 그 시대의 인물들’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 김교신과 논쟁하거나 깊은 교제를 나누며 1930~40년대를 이끌었던 기독교 지성들인 김인서 장로, 이용도 목사, 최용태 목사를 김교신과의 관계에서 비교, 조명했다.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과 장로교인이었던 김인서의 논쟁을 다룬 KC대학교 역사신학 전인수 교수는 이들 모두 교회를 사랑했지만 방법이 달랐다고 보았다.

“당시 조선교회는 무교회주의를 이단이나 교회 공격을 일삼는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김인서도 교회를 사랑하는 것만큼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조선과 조선교회에 대한 애정은 김교신도 김인서에 못지않았으나 사랑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김교신은 조선교회가 보다 성서적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때로 조선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김인서는 연약한 조선교회이니 비판보다는 이를 싸매고 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장로교인이었던 김인서 장로는 일제강점기 문서 운동가로 <신앙생활> 발행인이었다. 전 교수는 김인서 장로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고 교회 안에 있던 김인서가 교회 밖에 있던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에 대해 무엇을 문제시했는지, 그리고 김교신이 이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짚었다.

논쟁의 불은 김인서가 먼저 붙였다. 김인서는 무교회가 교회의 타락을 그 조직에 있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타락은 그 조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교회까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서도 ‘영적 제국주의의 야심’을 보았다며 그가 일본적인 기독교를 제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인서의 비판에 대해 김교신은 1930년 <성서조선> 8, 9월호에 걸쳐 ‘우치무라론에 답하여’ 제목의 글을 발표해 반박했다. 거기서 김교신은 자신이 우치무라의 제자인 것을 밝히면서 우치무라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치무라의 강연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말씀을 조선에 적용시킬 수 있었으며, 그로부터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각과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우치무라에게 배운 것은 단순한 무교회주의가 아닌 복음의 오의(奧義)였다면서 무교회주의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모든 신교 교회가 구교로 퇴화할 때에 다시 한 번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주창한 것’이었으며 이는 성서가 증언하는 바울의 교리를 잇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전 교수는 “김인서는 우치무라의 신앙과 사상을 일본적이라고 본 반면 김교신은 우치무라의 사상이 일본혼을 관통했듯이 조선인의 영적 척추도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면서 그러나 김인서는 정작 일본교회의 조선전도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지적, “김인서가 비판한 일본적이라는 것에는 기독교에 정치적인 의도가 묻어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기독교가 일본화 되면서 기독교의 정통성에서 이탈했다는 교리적 의미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용도목사기념사업회 정재헌 간사는 ‘성서조선과 예수교회: 이용도와 김교신이 만나다’로 발표, 김교신의 지원자였던 이용도과의 관계를 소개했다. 김교신이 김인서와 논쟁을 벌였다면, 이용도와는 서로 지지해주는 관계에 있었다고 밝혔다.

열정적인 부흥사인 이용도 목사는 김교신이 서울 교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때 길을 열어주고자 광화문교회에 초청했고,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 잡지를 주변에 소개하다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반대로 김교신 역시 이용도가 이단자로 몰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수차례 <성서조선>에 그를 향한 신뢰를 보내주었다.

정 간사는 “<성서조선>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고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했다면, 이용도와 예수교회는 교회에 예수를 주고 교회를 예수 위에 세우는 것을 꿈꾸었다”면서 “두 그룹은 예수 또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조직 교회보다 우선으로 파악했다”고 짚었다.

한동대 류영대 교수는 ‘김교신과 최태용’에서 교회를 개혁해 조선인의 주체적 신앙을 확보하려 했던 최태용 목사와 김교신을 조명했다. 둘은 동일하게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나, 서로 다른 양상으로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발표에 앞서 유족 대표로 인사에 나선 김교신의 넷째 딸 김정옥 씨는 “김교신 선생님을 그 주변 인물인 김인서 장로, 이용도 목사, 최태용 목사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면서 “아버지가 그분들과 교류하고 때로 논쟁하면서 만들어갔던 1930-40년대 한국 기독교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우리가 나아갈 길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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