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는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 그가 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책 이야기밖에 더 있겠나. 하지만 ‘밖에’라고 말하기엔 책은 너무나 넓은 바다. 올해도 책과 더불어 살 수 있어 감사했다. 더욱이 올해는 처음 진행해본 독서모임 덕분에 책을 매개로 여러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독서모임에서 읽은 아홉 번째 책은 내서니얼 호손의 <주홍글자>였다. 아시다시피, 아기 때문에 불륜 사실이 발각되어 주홍글자를 옷 앞에 새기고 다니는 치욕을 안고 살아가는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과 자신의 죄를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괴로워하는 불륜상대 아서 딤스데일 목사의 대비가 소설 전체를 끌고 간다. 오늘은 딤스데일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딤스데일 목사는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갖가지 방식으로 고행과 자해를 일삼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죄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심한 그 나름으로는 용기를 내어 설교시간에도 여러 번 자신의 죄를 두루뭉술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딤스데일 목사가 죄를 자백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유약하고 소심한 딤스데일 본인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존경받고 촉망받는 지위에 있는 그런 사람이 죄를 고백하고 몰락과 치욕이 기다리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진실을 털어놓고 회개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 헤스터 프린이라는 점이다.

첫째, 헤스터 프린은 혼자 모든 것을 안고 가려고 한다. 불륜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자신은 죄인으로서 뭇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를 받으며 살면서도 딤스데일 목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딤스데일 목사가 내면의 괴로움에 못 이겨 시들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따름이다. 둘째, 그렇게 뉘우치고 자책했으니 이제 된 거 아니냐고, 그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귀한 설교들을 했지 않느냐고, 아예 대놓고 엉터리 사죄를 선언한다. 셋째, 전남편(칠링워스)의 손아귀에 걸려들어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용감한 당신 운운하며 해결책을 기대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딤스데일을 위해 프린은 계획을 세운다. 딤스데일 목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거기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리라.

한마디로, 헤스터 프린의 사랑이야말로 딤스데일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소심함과 비겁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큰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거짓의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이 드러난다. 너무나 확실한 해결책으로 보였던 프린의 영국 도피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소용없게 만들어버린 사람, 빠져나갈 길을 막아버린 사람이 다름 아닌 칠링워스였던 것이다. 물론 원수의 목적은 진실을 말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곁에 두고 계속 괴롭히려는 것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거짓된 삶을 이어가도록 유혹하는 연인과 그런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진실을 토로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을 허용하지 않는 원수라는 역설적 구도가 여기서 탄생한다.

딤스데일은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죽어가면서 세 가지를 거론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한다. 7년 간 그를 괴롭힌 양심의 가책과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고문한 칠링워스, 그리고 군중 앞에서 ‘수치스럽지만 빛나는’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딤스데일이 여기서 고백한 이런 자비, 즉 괴로움과 수치와 원수 칠링워스의 집요한 정신고문의 형태로 찾아온 자비를 C. S. 루이스의 표현을 빌려 ‘잔인한 자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괜찮다, 평안하다, 다 그런 거다, 그만하면 됐다, 이런 온갖 다정하고 긍정적이고 친절한 다독임.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이런 말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독일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이 우리를 우리 죄 가운데 주저앉아 망하게 할 수 있으니. 그런 독사과가 때로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들의 손으로 건네질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잔인한 자비를 알아보고 그 자비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완전할리 없는 내가, 우리가 늘 좋은 말만 들어도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일이, 그 사람이 혹시 그분의 잔인한 자비는 아닐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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