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제 3기의 출발점에서…

어느 방송사는 3.1운동 100주년 캠페인을 걸죽하게 하던데, 자칫 말잔치로 끝날 수 있겠다는 우려가 있다.

설마, 하다가 나라를 통째로 빼앗겨버렸으니 어느 누군들 분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금년은 1919년 3월 1일로부터 100년째의 해다. 나라 찾기 운동으로 민족 자결과 비폭력 행동으로 팔도전국은 물론 중국 상해,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으로까지 이 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그때 전국 교회망이 총동원되고 뜻을 품은 신자들과 독립운동 지사들이 겹치면서 운동은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곧바로 무단(武斷) 통치에서 문화(文化) 통치로 바꾼다. 당근과 채찍을 절묘하게 구사하며 대한조선인의 양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대한조선은 1930년대에 들어선 후에는 교회들이 고분고분 응하기 시작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친일파로 전향해갔었다. 1938년 한국교회는 일제의 ‘해산령’을 받게 되었다. 내로라는 지성인들도 향후 최소한 1백년 이상 일본의 통치를 받을 것으로 판단해 창씨개명은 물론 친일 지식인과 지도층 인물들이 대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기는 백범 김구 선생마저도 일본 천황이 항복하자, “한 주일만 더 있다가 항복하지” 했다는 일화가 떠돌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장준하 등이 군사훈련 받고 광북군이 이름으로 국토 내부로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었으면 일본 패전과 전후 처리과정에서 분단을 극복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다만 김구 선생이 맨발로 뛰어나와 해방 만세가 아니라 꿈에도 그리운 해방 소식이기는 했겠지만 아쉬움과 탄식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들 대한의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흐름과 서구 열강, 또는 1945년 6, 7월 무렵 일본군은 계속 후퇴했고, 8월에는 동남아 등 그들의 점령지에서 일본 본토까지 쫓겨 가서 항전할 때까지도 대한의 사람들은 일본이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줄을 몰랐었다.

하기는 친일 문제로 곤욕을 치르던 때 미당 서정주 같은 시인이 적어도 백 년 정도는 더 일본 통치가 길어질 줄 알았다, 했으니 대다수 사람들이 해방(광복)의 날을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토록 예측이 어려웠음은 독립운동이 30년대 이후는 3.1 만세운동 초기와 같은 열정이 많이 시들어 갔으며, 또 독립운동 측도 서구 민주주의와 소련 공산당 운동 측으로 양분되었고, 오히려 공산, 사회주의 계열이 더 많았던 사정도 포함한 당시 3.1운동 후기의 영향일 수 있다.

오늘의 3.1만세는 통일지향이어야 한다. 남쪽은 대한민국, 북쪽은 조선공화국, 일단은 외세에서 벗어났으니 각기 선진형 국가로 성장만 하면 그때 비로소 통일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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