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부터 15년간 간행된 <성서조선> 영인본 8권으로 펴내

▲ <성서조선> 영인본(전8권)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엮음/홍성사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조선에 등불처럼 타오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선산 기독교’의 방향을, 민족을 향해서는 삶의 가치와 희망을 제시했던 <성서조선>을 볼 수 있게 됐다. 홍성사는 1927년 7월부터 약 15년간 간행된 동인지 형태의 신앙잡지 <성서조선> 영인본을 전 8권으로 펴냈다.

시대적인 간격을 메우기 위한 색인까지 포함해 1권 776쪽, 2~6권 706쪽 안팎, 7권 456쪽, 색인 148쪽으로 완성됐다.

<성서조선>은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 등 여섯 신앙동지들이 조선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성서로 보고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표어로 창간했다. 조선의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가 성서 신앙으로 각성시키려 했던 <성서조선>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많은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등불 역할을 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성서조선>은 대부분 신·구약 성서를 알기 쉽게 해설하는 한편, 조선과 세계의 역사를 성서적 입장에서 관통하는 역사관을 소개했다. 또한 신앙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내며 질타하는가 하면 말씀대로 사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성서조선> 하면 떠오르는 인물, 바로 김교신이다. 김교신 선생은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은 물론 온갖 허드렛일까지 맡으면서 삶의 전부를 바치다시피 하며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일반적으로 국판 27면 내외였고 발행부수는 가장 많을 때도 300부를 넘지 못했으나, 고정 독자들 가운데 이승훈 등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많았다. <성서조선>은 고정란으로 애국신앙교육을 다룬 ‘권두언’과 여러 인사들과의 만남이나 서신을 기록한 “성조통신”을 두었는데, 특히 성조통신란은 김교신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1942년 3월호 권두언에 실린 ‘조와(弔蛙)’의 내용이 조선인을 혹한에 살아남은 개구리에 비유하여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폐간 당했다.

(사)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2017년부터 영인본 재간행 작업을 시작, 1982년 노평구(盧平久)가 복사·간행한  <성서조선> 1~158호 전권을 다시 스캔하고, 체제를 약간 바꾸어 연(年) 단위로 2년씩(1권은 3년) 묶었다. 간혹 원본에 페이지 숫자가 잘못 매겨진 곳, 조선총독부 검열에 의해 삭제된 곳 등을 다시 확인하고, 복사·간행한 <성서조선>에 빠져 있던 몇몇 부록 등을 모두 수록했다.

<성서조선> 영인본과 함께 내는 색인집에는 4,400여 개의 표제어가 수록돼 있다. <성서조선>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저서 및 그 외 작품명, 사건명 등을 망라해 정리한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 당시에는 서양 인명과 지명의 경우 표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고, 오늘날 쓰지 않는 특이한 한자어(정말(丁抹; 덴마크), 사옹(沙翁: 셰익스피어) 등) 또는 훈민정음의 자음으로 표기된 것들을 색인어는 모두 현대식 표기와 함께 나타냈다.

(사)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이만열 이시장(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성서조선> 영인본 간행사에서 “<성서조선>이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지향해 간 ‘조선산 기독교’를 지향하며 간행된 것”이라면서 “<성서조선>을 복간하는 이 시점에도 같은 공감대에 서 있다. 한국 신학에 바탕한 한국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바로 그 공감대다. 이것이 <성서조선>을 이 시점에 복간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발간 취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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