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1~4, 25~29

▲ 오 세 준 목사
새누리교회

성경은 죄인이 구원 받게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유난히 성경이 물질의 복 받는 비결의 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경을 가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축복을 말할 때 단골메뉴로 자주 등장시키는 인물 중의 하나가 야곱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는 복을 알려주기 위해 야곱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야곱이 받은 복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갈 때였습니다. 어느 곳에 이르러 밤이 되어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창 28:14).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신 언약과 똑같습니다. 이 복을 갈라디아서 3장 8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전해준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준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복을 먼저 받았습니다(롬 4:1~8). 그러므로 야곱이 받은 진짜 복은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게 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쓰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최고의 복도 바로 이런 복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죽 한 그릇을 주고 형 에서에게서 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이런 과정을 통해 야곱이 장자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처럼 속여서라도 축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속임수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같이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은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나 의로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롬 9:10~13).

그러므로 야곱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부자 되는 비결정도로 치부한다면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곱이 벧엘에서 십일조 서원을 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논리는 비성경적입니다. 본질은 십일조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있습니다. 물론 이 언약은 앞서 언급한 대로 부자 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였습니까? 야곱의 십일조 서원이 먼저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때문에 야곱이 십일조를 하든지 안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십일조 서원과 부자 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이삭에게 별미를 바치고 축복기도를 받아서 복을 받았다고 하거나 십일조 서원을 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설파하는 것은 야곱이 받은 복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축복 기도의 불편한 진실

한국교회 안에는 여전히 야곱이 받은 복을 물질의 복으로 전하면서 축복기도를 받으려면 야곱처럼 별미(특별) 헌금을 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물질의 복을 받으려면 야곱처럼 십일조 서원을 하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특별 헌금을 하든, 십일조 헌금을 하든, 어떤 헌금을 하면 목회자가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축복기도의 내용이 가관입니다. 헌금 바친 것의 몇 백배는 기본이고 몇 천배, 몇 만 배로 보상해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듣기에는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물론 교인들이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순전한 마음의 표현으로 단순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이런 기도에 익숙해지면서 기복주의 신앙에 젖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식이 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축복기도를 받고 몇 백배, 몇 천, 몇 만 배로 복을 받는 응답이 왔습니까? 이렇게 응답이 왔으면 헌금을 바치는 기독교인들은 모두 거부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신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가난하다면 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마 6:31~32). 이런 가르침은 몇 백배, 몇 천배로 복을 달라는 축복기도가 바른 기도라고 할 수 있는지 성찰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으로 이미 받은 복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기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축복기도의 문제를 알고 보면 불편해집니다. 이제는 축복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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