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성작가 켄 가이어는 <새벽을 구하는 기도>라는 기도 시에서 “우는 법과 밤을 지새우는 법과 새벽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간이 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붙인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우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어둠 속에 벌벌 떨면서도/밤을 지새우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밤을 지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던지는 낙관론이 없어도/새벽을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인간이 된다는 게 뭘까. 인간의 도리를 알고 지킨다는 말이겠다. 인간다워진다, 성숙한다, 인간 구실을 한다, ‘제대로 된 어른인간’이 된다는 뜻이리라. 시인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우는 법. 처량한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주저앉아 우는 것 말고, 제대로 우는 법이 있다는 말이다. 자기 죄로 인한 통회의 눈물, 이웃의 아픔을 내 것처럼 아파하는 눈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 등이 떠오른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월스트리트에서는 축하의 건배를 했다고 한다. 군산복합체 주가 엄청나게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의 시골마을에서 권장생 선생은 열이 40도까지 올라 며칠 동안 앓았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을 이들 염려에 온몸으로 울었던 것이리라.

둘째, 어둠 속에 떨면서도 밤을 지새우는 법. 이 구절을 봤을 때, 자신이 맡은 지역을 지키는 경계병, 파수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는 어둠이 무서워도, 설령 벌벌 떨지라도 자신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상경하여 대학시절부터 결혼 초까지 다녔던, 말하자면 내 20대를 함께 했던 N교회에서 고등부 여름수련회 특강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교회 대학부 후배였던 고등부 부장 집사님의 초청으로 참석한 수련회 장소에는 학생들과 함께 여러 교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몇 분은 내가 20년 전에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바로 그분들이었다. 나도 꽤 꾸준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떠나온 그 교회에서 그분들이 20년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뭐랄까,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들에게서 자리를 지키는 어른의 모습을 보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이어져 있다. 어둠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밤을 지새우는 법이 그냥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세 번째 기도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용기는 견디는 힘이지만, 이것은 무작정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과는 다르다. 밤이 어두워도 새벽이 온다는 믿음이 그의 기다림을 지탱해준다.

N교회 고등부를 떠올려본다. 학생들은 계속 줄고, 공부와 입시 앞에 신앙이고 예배고 다 뒷전으로 밀리는 상황. 승패는 갈렸고, 해도 안 될 싸움이라는 패배감이 때때로 밀려온다. 내가 이 자리를 지킨다 한들 뭐 크게 달라지겠는가. 교사들은 이런 생각에 굴하지 않았다. 내가 새벽을 끌어와야 할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큰 흐름을 만들어낼 장본인, 주인공은 아니란 말이다. 그건 하나님이 때가 되면 하실 일이요, 필요하면 거기에 쓸 사람을 세우시리라. 나나 N교회 중고등부 교사들 같은 대부분의 어른들이 할 일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주변에서 돌아오는 젊은이를 맞아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김교신(1901-1945) 선생은 일제시대에 교육자로, <성서조선> 발행인으로, 누구보다 꾸준하고 한결같은 열정과 섬김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무교회주의자인 자신과 달리 교회에서 충실히 봉사하며 살아온 ‘교회교인’과 오랜만에 만나 교류를 하면서 양측 모두에서 원래 신앙의 모습을 유지하는 이가 많지 않음을 떠올리며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신앙은 정도의 높고 낮음도 아니요, 뜨겁고 그렇지 못함도 아니요, 오직 계속하는 일이 귀함을 절실히 느낀다.” 선생은 옳다고 믿는 바를 계속하는 것이 귀하고, 그것이야말로 참 보기 드문 큰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한때 뜨거웠던 사람이 식어버리고, 젊은 시절 대단한 일들을 했던 사람들이 노년에 변모하여 오히려 큰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겠으나, 그들을 보며 나는 다를 거라고 자신해서는 곤란하다. ‘계속하는 일’은 상황에 자신을 맡기고 늘 하던 대로 하면 나올 수 없는 결과인 까닭이다. 그렇게 하면 타성에 젖고 고루한 어른이 되어갈 뿐이리라. 귀하게 여기던 일을 (원래의 정신과 각오, 믿음과 기대를 품고) ‘계속하는 일’은 새로워지는 마음과 다짐이 끊임없이 일어나야만, 자신을 돌아보는 경성함이 있어야만, 서로를 격려할 동지들과 공동체가 있을 때에 가능한 비상한 일이다. 누가 그런 은혜 없이도 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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