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칼럼 > 칼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35~39)요한복음 탐구(탐색)_34
조효근 / 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1706호] 승인 2019.09.11  17:56:43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긴장감이 팽팽하다. 존재와 존재끼리의 이동, 여기에는 분명히 각 사람들 간의 차등이 있을 터인데 어느 누구도 힘에서 기울거나 기(氣)가 밀리는 것 같지가 않다. 먼저는 세례 요한, 이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언했다. 놀라운 발견이다. 그의 영적 통찰력에 기겁을 할 지경이다. 역시 고수다.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사건(눅1:5-25)이 있었으나 그는 광야 빈들에서 낙타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생활해 온 인물이다. 그 결과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배려일까.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사람, 성별된 삶을 사는 히브리는 잘 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누구인가를 잘 안다. 이는 아브라함의 “모리아 사상”에서 발원하여 이스라엘의 소원과 기도가 2천여 년을 지켜서 얻어낸 이스라엘과 인류 구원사의 방법론 제시까지를 꿰뚫는 신비한 언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주변을 서성이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아직 부족하다. 저분이 누굴까? 나사렛 예수, 아니다. 훨씬 뛰어넘는 직관력을 발동해야 가능하다.

세례 요한의 경건한 생활 위에 하나 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성령이시다. 아직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성령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과 성령의 상관관계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이 하나님의 어린 양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도행전 2장 이전에 성령과 마주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은 성령의 인증을 받는 사람들만이 만날 수 있는 신비한 관계다.
 

1. 스승을 떠날 수 있는 제자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자신들을 오늘이 없도록 가르쳐 준 스승과 함께 예수 가까이로 온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어린양 선언“을 했다. 제자들은 스스로 그 말씀을 알아들었다. 메시아 장본인이 그들 앞에 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서있다.

세례자의 제자들은 순간 결단을 했다. 본문 37절이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이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다. 본문 내용 중 어느 대목에서 두 제자가 고민하거나 망설임이 있는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충분히 준비된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습이라 해야 한다.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비범한 분위기다. 시쳇말로는 “고수들의 행동언어”라 할 수 있다. 말이라는 것은 가끔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말이나 글은 타 생명체들에 비하여 행운일 수 있는 도구지만, 어떤 표현으로 하면 인간이 말과 글이 있어서 만물의 영장이지만 달리 뒤집어 표현해 보면 말과 글 때문에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했고, 또 이토록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로 되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다 할 수도 있다.

인류사나 교회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들의 행동들은 말의 간교함으로 서로 배반하여 하나님을 노엽고 슬프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여기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 (아마) 우수한 사람들일 것 같은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와 또한 사람은 글을 쓰는 당사자일 터인데 이들은 세례 요한 사역의 책임자급이 분명하다.

이 두 제자가 그들이 지금까지 배움을 익혔던 세례자의 슬하를 떠나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예수께로 간다. 매정하다. 칼로 단번에 토막을 내버리듯이 두 제자가 예수의 발 앞에 선다.
 

2.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께서는 앞뒤 자르고 하시는 말씀, 무엇을 구하느냐? 돈이냐, 기적이냐, 영생이냐, 명예냐, 출세냐, 높은 사람 되기냐? 무엇을 얻기 위해 내게로 다가오느냐?

추상같다. 늦가을 된서리마냥 차갑다. 진리와 진리의 만남은 이토록 군더더기가 없는 법, 이 순간 예수의 모습은 어땠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형용으로 볼 때는 목에다가 시퍼런 칼을 들이대는 칼잡이의 순간 동작같이도 느껴질 만큼이다. 아마 두 제자는 간담이 서늘했을 법하다.
 

3.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역시 맞수다. 결코 예수 앞에서 밀리지 않는다. 빈틈이 없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를 향해 “랍비”로 호칭했다. 바리새파의 호칭으로 선생님이었다. 구세주(어린양) 등장 이전의 유대 이스라엘은 랍비가 진리 배움과 가르침 사이의 최고 호칭이다. 그 위에 “랍반”이 있으나 라반은 랍비 과정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큰 랍비” 또는 한 지역의 대표 랍비일 수 있다. 랍비는 사울(바울)이 지녔던 “율법사”와는 그 성격과 수준이 다르다. 율법사가 몽학선생일 때 랍비는 진리의 스승이다.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다. 이들의 대화에는 생략법의 연속이다.
 

4. 와서 보라!

스승이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밀릴 수는 없지. 와 보라!(Come and See!) 와야 보인다. 오면 본다. 묻고 설명할 필요 없다. 네비게이션 따위는 필요 없다. 여기서 프로테스탄트 사람들, 기독교 사람(신자)들은 진리를 놓치기가 쉽다. 기독교 사람들 특징을 보면 불필요한 부분까지 성경을 파고들어 쪼개고, 따 붙이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면서 성경 속에서 예수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많다.

본문의 내용들을 필자가 표현하는 의미까지 포함해서 거듭 읽어보면 무엇인가가 더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조효근 / 본지 발행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460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6길 73-6(연건동)  |  대표전화 : 02-3676-3082~5  |  팩스 : 02-3676-3087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483  |  등록일 : 1988.5.31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조효근  |  이메일 : dsr123@daum.net
Copyright © 2013 들소리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