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든지, 늘 쉽게 말하는 “크리스천들의 사랑”도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탄핵정국의 현실화로 민선 대통령이 임기도중 쫓겨나서 감옥으로 가서 2년이 넘도록 그곳에서 지금도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를 몰아낸 정권이 그보다 더욱 심한 무례를 저지르는 경우를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오늘의 상황을 생각해 보니 한국은 민주주의 하기에 적합한 인성 구조를 가지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거듭해 본다.

전에 한 번 소개했던 첸란 씨. 그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교사 출신인데 한국으로 귀하여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쓴 책 <살벌한 한국 엉뚱한 한국인>이라는 에세이집을 보면 “대한민국 사람의 관찰기”가 하나 있다.

“…한국인은 겉으로는 부를 경멸하면서도 부를 열망하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중략…,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인 한국에서 평등의식에 치우쳐 때로는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과 같은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공산주의를 배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국가 체제를 동경하며 지향하는 사람이 많다. 다 같이 못사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상대적인 빈곤은 훨씬 어려운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평등만 강조하면 다 같이 몰락하는 북한과 같은 빈곤의 결과를 초래하고 강자만 살아남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몰입하면 국가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모순 또한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후략…”(p.240~)

한 젊은 중국인 출신 여교수의 한국인 속성 진단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게 들린다. 이 글 속에는 한국교회가 정신 차려서 읽어야 할 내용이 있다. 한국인은 조선조 역사 속에서 반상의 계급 앞에서 평균 85% 인구가 노비들과 함께 마치 노예들처럼 가난과 학대, 특히 세종대왕의 한글을 천덕꾸러기 언문(한글) 대접하면서, 저 아랫것들은 언문도 몰라야 양반 족이 편하게 산다는 취급을 했었다.

유럽은 15세기부터 도시가 형성되고, 상인계급이 국왕이나 좌우정승급들과 거래를 하면서 자본과 관직이 평행의 조건 속에서 오고 갔는데, 우리는 20세기 초 고종 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100년 전까지 남북한 전체인구의 80% 그 이상이 개처럼 대접받고 살아온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평등”이라는 조건이 공산당이나 대한민국의 사람들 모두에게 목숨줄 같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평등이 그립다.

그런데 그 평등을 북한 공산당이 쥐고 있다. 그것의 감상에 취하다가는 모조리 그들의 노예가 된다. 북한의 평등은 노예의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지금 바로 한국인은 첸란 교수의 말처럼 북조선의 평등 짝사랑하지 말고, 인간의 기본 인권과 시장경제를 통한 이윤을 고루 분배하는 실력과 양심 있는 정치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위선자는 안 된다. 낡은 이데올로그(이념 주장자)는 더욱 안 된다. 나만 옳다는 더더욱 위험하다.

다시 한 번 해 보자. 우리 한국인의 21세기형 자신감을 한국교회가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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