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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소리는 나의 모리아, 또 나의 골고다”나의 신앙 나의 예수 >7<
조효근/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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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호] 승인 2019.11.27  07: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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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파격적으로
21세기 대안 제시를
해야 한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모리아를
축으로한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영토를
아브라함의 기본
살림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좌로는 지중해,
우축으로는 아시아를
좌우로 껴안아야 한다.

 

기독교는 “상대적 도덕 기준”으로 존립하는 이데올로기형 종교가 아니다. “오직 절대 도덕 기준” 곧, “십자가 예수”가 그 기준임을 알아야 된다. 그러나 상당수 기독교 사람들은 이론에는 동의한다면서도 기독교를 “상대적인 도덕 종교”로 만들어버린 무지와 위선의 동조가 노릇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문제의 근원이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모리아 검증”을 끝낸 이삭의 큰아들 에서가 이스라엘 무대에서 탈락을 하게 되는 시간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왜일까? 도무지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 석연치 않은 것이 아니라 (도무지) 동의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투기에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 왜 그랬을까? 야곱은 어떻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자기 육친이요 친형을 내칠 수 있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1. 야곱의 배반과 불신앙은 없을까?
  (창 15:18)

야곱의 죄가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배반한 죄다. 그것은 창세기 15장 18절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5장은 야곱의 할아버지요 인류 구원의 믿음을 확실히 정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약속(언약, 계시)을 야곱 스스로가 소홀히 했음을 알 수있다.

왜 이 같은 논리가 가능한가? 성경을 펴보라. 야곱의 열한 번 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늙은 아비와 형제들을 부르니까 야곱은 그 자손들 칠십 명(창 46:27)을 이끌고 대제국 이집트(애굽) 2인자인 국무총리 신분의 아들이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애굽 가서 영달을 누리는 것도 좋으나 할아버지의 신앙 핵심인 “모리아 제단”(창 22:1~12)은 어찌하고 가는가? 모리아, 아브라함이 100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친 “모리아 제단”, 바로 이 신앙에 기초한 “이스라엘” 영토는 어찌하고 애굽으로 가는가? 혼자서 가는 여행이 아니다. 70명 모든 가족의 이주다. 갈대아 우르는 물론 하란을 떠나 첫 번째 정착지 세겜(창 12:6~), 두 번째 정착지 헤브론(창 13:14~)까지 모두 버리고 떠난다. 더구나 모리아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의 중앙에 자리한 이스라엘 신앙의 심장부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는가? 그럼, 야곱이여, 당신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획득한 믿음의 계보는 어찌하려고 생각했는가? 결과론이지만 당신이 가족 모두, 뿌리까지 뽑아버리고 떠난 가나안 땅 이스라엘 민족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의 모리아 제단을 430년(야곱 자손이 모세 등장까지 애굽 더부살이의 기간임) 동안 비워두었으면 이미 포기한 땅 아닐까?


2.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되찾아야
   역사가 제자리 잡는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마치 겨루듯이, 또는 철없이 덤벼들 듯이 달겨든다. 아브라함이 아직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기 전이다. 성경은 “많은 민족의 조상 또는 ‘열국의 아비’라고 표현하지만 우리 한국식은 억조창생”이라 표현한다. 아브람이 잠시 후(창 17:5)에는 “아브라함”이 되는데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 또는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열국의 아비, 억조창생의 아버지이니까 온 세상을 말해야 하겠으나 아브라함 당시는 아직 문명시대가 본격화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당부하신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나일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테스 강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바로 이 약속을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묵살한 것인가? 그는 아무런 대책 없이 가나안 땅(팔레스타인 땅)을 내던져버리고 떠났다. 휴가 떠나는 길이 아니다. 그는 그의 혈족 70명과 떠난 뒤 자그마치 430년을 애굽살이를 그의 자손들에게 내맡겨버렸다.

만약 그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이어받았으면 대책을 세우고 떠나야 했다. 가족 중 절반 또는 일부를 팔레스타인 땅에 남겨두어야 했다. 크게 먼 거리도 아닌데 애굽에 가서 팔레스타인에 남아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반드시 지켜낼 방법을 마련했어야 한다. 만약, 자기 직계 혈족을 일부 남겨둘 처지가 못 된다면 어떤가? 이스마엘과 에서의 자손들도 야곱 자신은 물론 이삭과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는 혈족인데 왜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키도록 부탁할 수 없을까?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야곱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포기한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할례 법칙마저도 변개시킨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할례와 야곱의 할례가 다르다. 아브라함의 할례를 보라. 창세기 17장 전체의 말씀이거니와 특히 13절을 보면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니…”라 하였다.

여행길에 잠시 아브라함 집에 머무는 자, 돈 주고 사들인 노예들까지도 아브라함의 할례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야곱은 다르다. 자기 직계 혈족만 할례 받도록 했다. 이두매 사람들, 헤롯의 가문이 할례 받고자 얼마나 노력을 하던가? “이두매 사람들”은 모두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자손들인데도 말이다.

무엇을 더 말하랴! 야곱은 가나안 땅, 곧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 속칭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할례 범위와 정신을 소홀히 하고 변개시켰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3. 아브라함의 법칙으로 계산한다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파격적으로 21세기 대안 제시를 해야 한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모리아를 축으로한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영토를 아브라함의 기본 살림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좌로는 지중해 우축으로는 아시아를 좌우로 껴안아야 한다.

아브라함을 쉽게 생각하는 자들이 기독교 주변에 서성거린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악한 자유주의자들을 조심하라. 아브라함은 “산 자의 하나님”에게 인정 받았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승계한 메시아(모리아) 예수의 직계가 우리들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발자취와 언행, 그리고 야곱과의 비교를 하면서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사를 가다듬어야 할 것 같다.
 

4. 다시 출발한다

필자는 7살에 기도 시작, 17살에 응답을 받은 후 준비를 거듭하다가 35살에 출가했다. 이미 밝힌 대로, 미친놈처럼 필자 혼자서 뛰고 달렸다. 누가 묻지 않아도 가르쳤고, 칭찬 하지 않을 때도 전도했다.
필자가 초기에 은혜 받은 후 복음을 증거(노방전도, 전국 무전여행 전도, 소규모 집회, 10대의 나이에 정식 부흥회 강사 노릇까지) 했는데 사람들의 칭송이 어찌 각별했는지…. 어떤 사람들은 “아마, 천사가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면서 나를 섬기려 들었던 19살 때가 있었다.

그때 필자가 하나님께 “주여, 필자는 천사나 의인이 아니잖아요. 칭찬이 싫어요. 차라리 사람들이 칭찬하지 못하게 똥물이라도 끼얹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때도 있었다.

우여곡절, 그 많은 수고와 기도, 시련까지를 겪으면서 서른다섯 살에 집에서 처자식 내팽개치고 도망질 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굶고, 춥고, 고생하기도 했고, 7년 안식년이면 가족을 부른다 약속했으나 1981, 1982, 1983년 세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제는 안식년이 여섯 번 지나갔다. 제7차 안식년에 돌입했으니 2024년이면 7×7년 드디어 희년이 온다.

필자 인생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2024년, 앞으로 5년이면, 또 그때까지 목숨이 붙어있으면 드디어 2024년이면 희년이다. 주 예수께서 나에게 무엇이 되게 하실까, 기대된다.

필자는 모리아 제단에서 메시아가 수태하신 것을 보았다. 그래서 모리아는 나사렛 처녀 메시아(사 7:14)다. 마리아는 아들 그 사람 예수를 골고다에서 메시아로 출산했다 의미상으로 그렇다. 그리고 그가 또 나를 또 낳으셨다. 

필자는 처음부터 가톨릭을 만나야 한다, 유대인을 버리지 말고, 아라비아 그 자식들은 요단강 건너지 못한 비스가산까지 뿐 더는 따라오지 못했으나 그들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모리아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쉽게 버릴 수 없다. 골고다, 그분의 죽으심에 동참한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면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들 아라바 자식들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책임지어야 할 부채인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낡은 시대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가까이에서 울부짖는 공산당의 아가리도 끝내 피하지 못할 것이고, 가톨릭, 유대인, 이슬람 따위는 우리들과 상관이 없는 사탄의 것들이라고 고집한다면 더 이상 치고 나갈 출구가 없다.

출구를 찾지 못하면 우리가 먼저 죽는다. 기독교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에게 ‘상대적 종교’ 취급을 당하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기독교는 절대 종교다”라고 해도 어느 누가 나에게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기독교 스스로가 우리는 ‘절대적 종교’라고 하더니, 또 얼마 지나서는 우리는 ‘상대적 종교’라고 한 단계 내려가더라. 이제는 ‘상대적 종교’에 자족해야 한다. 조금 더 있으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종교, 또 무방비 세월 보내다가는 기독교 따위는 없어졌으면 좋겠다, 거추장스러운 무가치한 종교다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출구를 찾아야 한다. 더는 그냥 세월을 허송할 수는 그래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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