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탐구(탐색)_50 2장 23~25절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에서 이삭을 바칠 때부터
예수의 골고다까지 유대 이스라엘과 기독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에 바치듯,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골고다에 내던지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
인류는 하나님의 분신(지체)임을 선포하셨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으나 예수는 저들을 믿지 않으셨고, “스스로”에 대한 무한 신뢰를 밝혔다.

‘이 성전을 헐어라!’ 하셨을 때,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은 것인데 사흘 안에 짓겠다는 말로 허황되고, 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집인데 감히 한 인간이 건방진 말을 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하여 웃어넘긴다. 그나마 하나님의 성전을 욕보이는 자라 하여 “참람죄”를 적용하여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그들 중에는 예수를 선지자로 대접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며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서, “내가 믿노라!” 당신이 선지자임을 믿는다 하면서 예수 가까이로 달려드는 이들이 많았다.
 

   ///  이 몸이 성전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 선언, 또는 가르침이 요한복음 기록자의 신앙(신학)으로는 몸의 성전이다. “이 몸이 성전”임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이 몸이 하나님의 몸임을 모르고서야 어찌 예수를 알겠는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어야 한다. 나와 너의 몸이 성전이야. “성전”이라는 종교적 언어를 일상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몸”, 하나님이 나무라면 “그 가지”가 그리스도인인데, 이는 “요하복음 15장”에서 충분히 예수께서 직접 설명해주고 계신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에서 이삭을 바칠 때부터 예수의 골고다까지 유대 이스라엘과 기독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에 바치듯,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골고다에 내던지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 인류는 하나님의 분신(지체)임을 선포하셨다.
 

   ///  이 깨달음의 시간까지

인류는 예수의 이 말씀(요 2:19~)을 깨닫고, 헤아릴 수 있는 날까지 고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의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해석(해독)하지 못하여 은혜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를 받고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거리에서 만난 그 많은 유대인들, 스스로를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의 박해로부터 살아남은 자라는 자부심에 찬 바리사이들과 성전주의 사두가이들이 함께 공모하여, 예수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이를 박대하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성전 안에서 북새(bustle)를 떠느냐?”고 예수를 힐난하는 모습을 본다. 준비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의 평가는 냉혹(냉정)하다. 과연 너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나 예수를 아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곧 산 자의 하나님을 너희가 맞이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냐고 예수는 묻는다.

지금, 우리는 예수와 유대인들의 시비현장인 예루살렘 사정을 생각할 필요 없다. 오늘 우리들이 바로 서 있는 “그 예배당”이 “예루살렘 성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보이는 오늘의 우리가 예수께로부터 받는 불신을 발견해야 한다.
 

   ///  그래서, 내 몸을 내가 지킨다

예수는 나 예수의 몸을 너희에게 의탁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주 예수와 더불어 “하나”되기를 싫어하는 자, 그는 사탄이다. 사탄은 태초로부터 하나님을 거역했다. 가브리엘, 미가엘, 그리고 그 나머지 한 자리가 누구의 자리인가? 순종하여 천사장, 불순종이면 사탄이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흉악한 신학이 있는데 그것은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육신은 사탄이 창조했다. 하나님보다 한 수 아래 하나님 노릇을 해 온 사탄은 마지막까지 예수 곁에서 속삭인다.

“…내가 당신을 섬기겠다고…” 말이다. 세례 받은 후 광야 40일 시험 받으실 때 사탄은 예수께 “내게 절하라”고 했지만 섬기라는 말이나 섬기겠다는 말을 적절하게 혼용하는 거짓말쟁이가 사탄이다. 예수 곁에 와서, “우리가 믿노라” 하였으나 예수는 이미 저들의 마음이 도적이요 사탄임을 아시고, “또 친히 저희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게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고 요한복음 기록자는 예수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야, 어렵다!

일단 어려운 말씀이다. 특히 “요한복음은 웃고 들어왔다가 울고 물러서는 복음이다.” 요한복음은 발가벗은 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또 다른 표현으로는 단 하나의 거짓이나 숨김이라도 있는 사람은 요한복음풀이는 헛바퀴 굴리기다.

요한복음은 신(神)의 언어다. 표현방식도, 가장 문학적 문장이면서도, 신학적 핵심체다.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시점에서 표현된다. 영문법 시제로 말하면 현재완료와 미래완료가 혼용되고 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이하의 부활론 시제가 현재와 미래의 혼용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의 뜻을 함축할 때는 현세에 강세가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부활은 현세 부활부터 시작된다.

혹시 필자 표현이 거북스러운가? 10여 년 전, 어느 토요일 한 목사님이 필자의 요한복음 부활론에서 미래를 현재로 표현하면 되느냐고 항의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필자에게 주신 요한복음은 가장 언어의 문학성을 잘 아는 기록자가 글쓰기 싫어서 몸살을 앓으면서 쓴 글로 보인다. 필자도 글이나 말로 요한복음을 표현하기가 싫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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