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설교/누가복음 24장 24~25절

지금 지구상 모든 나라들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하루에도 수천 명씩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다시 사는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두려움을 이겨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백종선 목사
순복음세광교회 담임
본지 이사장

실제적으로 일어난 어떤 사실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진실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인데도 내가 그 일어난 사실을 절반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은 진실이 되지 못합니다.

사실이 아닌 어떤 사건에 대해서 내가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은 거짓이고 공상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신천지라는 종교에서는 교주인 이만희라는 사람을 계시록에 나오는 ‘이긴 자’, ‘말씀을 먹은 자’ 또는 ‘보혜사’라고 주장합니다. 이 거짓된 주장을 다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은 거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일어난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치할 때 거기에 진실이 있고,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그 사건은 그에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은 있는데 그것을 내가 믿지 못한다면 그 사건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죽은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도 분명히 역사적 사실입니다.

당시 로마정부로부터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던 빌라도가 쓴 빌라도의 보고서란 역사적 자료에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은 아무 일도 아니고, 아무런 관심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들의 삶속에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 스페인의 화가 고야(Francisco Goya, 1746~1826), 1823~25년경, 유화, 29×25.5cm, 필립스 콜렉션, 워싱턴

1. 예수님의 부활은 그 당시 확실한 사건이었는데 왜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안 믿었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1)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너무도 크고 놀라운 신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역사적 사건은 없었고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에도 없었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지식도 없었습니다. 즉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자기의 생각에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란 이 엄청난 신비의 사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경험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이고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과 지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영원한 세계에서 100년도 못살다가 죽는 인생이, 이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이 기다렸던 메시아 즉 구세주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세주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정치적 속박에서 건져줄 정치적 구세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의 본래적 사명을 잘못 오해하여 정치적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지혜를 가르치시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군중들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예수님의 인기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정치적 메시야가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저 막강한 로마의 군대를 다 몰아내시고, 그렇게도 기다렸던 다윗의 왕국을 다시 재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왕이 되실 이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 다니면 앞으로 유대나라의 왕이 되실 때 나도 한 자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조차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힘없이 죽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셨던 예수님께서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하는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아무런 말없이 비참하게 죽어 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뒤집어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천벌을 받아 쓰러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없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그대로 죽어버리셨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실망한 것입니다.

본문의 21절에 이때의 제자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하였습니다. 그토록 유대나라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기다렸는데 이렇게 힘없이 죽어버리고 말았으니 얼마나 실망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실망한 마음, 낙심한 마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미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너무나 낙심하고 실망하여 마음을 열지 못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2. 그런데 이 부활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부활을 환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생각하는 윤회설에 근거한 생각입니다. 영혼은 하나인데 전생의 업보를 따라서 끊임없이 태어났다 죽었다하면서 그때마다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윤회가 아닙니다. 환생도 아닙니다.

2) 부활을 회생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었던 나사로의 소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죽었다 회생한 사람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회생이 아닙니다.

3) 영혼 불멸설입니다.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고 영혼만 영원히 산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의심 많은 제자 도마는 예수님의 영혼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하시면서 못자국난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모습에서만 설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단 한번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사건과 그 모습에서 부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진리이고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속에서 새로운 사건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그도 예수님의 부활에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53절에 보면, 부활의 모습은 신령한 몸으로, 신령한 생명과 신령한 이적으로서의 부활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 추하고 연약한 몸, 이 낮은 몸을 예수님 자신의 부활하신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먼저 경험한 사람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보지 못한 남극이나 북극은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죽음과 부활은 내가 경험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다른 세계에 있게 됩니다.

여러분! 꼭 죽음을 경험하고야 죽음을 믿으시겠습니까? 남의 죽음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는 것이구나.”하고 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와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건을 보면서 나 자신의 부활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나도 죽으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나도 예수님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겠구나 하고 내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실망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순간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던 길을 다시 돌려 복음을 증거합니다. 34절에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라고 선언합니다. 이제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단순해졌습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확신하니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많으나, 죽음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지. 사업이 어떻고 사람이 어떻고 직장이 어떻고, 사소한 감정의 상처나 자존심, 체면, 이해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요, 가장 큰 문제인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도 예수님처럼 죽어도 다시 산다는 진리와 사실과 믿음 앞에서 죽음의 문제는 극복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문제가 시시한 문제일 뿐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 넘어 저 영원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어도 다시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부활은 내 부활이기에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요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 모든 나라들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하루에도 수천 명씩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다시 사는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두려움을 이겨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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