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이후 1500여 년이 지날 즈음, 복음을 최선두에서 가르치는 ‘사제’들의 말이 성경에 어긋나 있는 것을 보고 개혁을 외친 사람, 마르틴 루터. 그는 잘못된 것을 조목조목 말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앞서서 가르치는 사제인데,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외침이었다.

마르틴 루터 외에도 그 즈음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고, 살아야’ 함을 외친 이들은 적지 않았다. 존 칼빈, 츠빙글리, 후퍼, 로크, 토마스 뮌처 등….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거나 화형을 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이하는 10월 31일을 즈음해서 너무 조용한 2020년이었다. 코로나19를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 현실의 문제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동성애 문제’와 관련한 ‘차별금지법’을 저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무성한 10월이었다. 개혁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를 숙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왜 교회는 목사님들마다, 교회마다 성경에 대해서 얘기하는 부분들이 다르냐”, “한 건물 건너에 또 하나의 교회가 있는 것을 보면 교인들을 숫자로 보는 것 같다”, “목사님들이나 교회는 왜 그렇게 빈부격차가 심한 것이냐, 서로 경쟁상대로 여기는 것을 보면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들 같지 않다”, “교파가 많다고 해도 모두 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형제인데, 어떻게 수십 개의 교파로 각자 선교하고 봉사하느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저렇게 설명도 하고 변명을 하게 되는데 그런 나 자신과 목회자, 성도들을 보면서 ‘답변이 참 궁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서 산다’(코람데오)는 ‘신자’이니,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감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작은 나 자신의 존재로 어떻게 기여하며 살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런 자세로 임하고 있는 성도, 목회자, 교회들은 현재 위치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분량대로 치열하게 살아내려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작은 것이나 많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 속에서 주님이 요청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며 그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살아계신 주님’을 내 곁에서 느끼게 된다.

오늘의 계절은 어떤가. 아무도 노력하지 않았는데 봄이 되고 여름이 가니 가을이 찾아와 산과 들에는 온통 구릿빛과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창조주 그분의 호흡하심, 일하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시간은 창조하신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 본인이 이루실 그 세계의 ‘과정’에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살고 있는 ‘작은 자’일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두고 걱정이 많다. 감리교의 한 목회자는 ‘정직 2년’이라는 징계를 맞아 항소 중이고, 기독교계 방송들도 정부의 방통위에서 ‘징계’를 먹었다. 목회자들은 동성애가 현실화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색안경 끼고 문제라고 말도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며, 동성애자들이 ‘차별’을 느꼈다고 신고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며 심히 우려하고 있다.

발의한 국회의원들도 국민들이 제대로 알고, 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투명하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와 관련한 변호사, 법학과 교수, 목회자 등도 얘기하는 이들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깊이 숙고해야 할 부분은 법안의 문제점과 함께 ‘동성애자’들을 비난하는 것 같은 기독교의 이미지로 사회에, 언론에 비쳐진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처벌할지 그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몰려온 이들을 아무 말 못하고 뒤돌아 가게 한 그 ‘말’, 그 ‘마음’, ‘모습’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종교개혁 503주년을 보내면서 왜 자꾸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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