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사목자(司牧者)로서의 목회자나 만인제사를 신앙에 기초한 평신도 사목들 운동의 공동 선교 현장을 제시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은 평신도 신학, 평신도 시대의 열어감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제사장이 아니었으며 또 하나님 자신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제사의 당사자가 사람 앞에 나타났으니 종교 포기, 탈종교시대의 개념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아프리카와 지중해 권이 “해방기”였기에 그 시대는 원초적인 종교와 신학의 제시가 되었고, 16세기는 뒤늦은 해방기를 맞이한 북방계까지 지구인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으니 사실상 13, 14, 15, 16세기가 종교일반론을 말할 수 있는 때였다.

루터(1517년), 아나밥티스트(1525년) 사이가 8년 차인데 루터는 중·근세 인물, 재세례파는 근세에 진입한 문명의 시혜를 받아서 평신도 사목운동을 전개했었다.

우리는 16세기를 생각하면서 오늘 21세기 기독교는 참 종교, 유일종교다운 용기를 폈으면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가 코로나19 시대에 즈음하여 “대면” “비대면” 예배뿐 아니라 “비대면 복음 운동”에 “평신도 사제”를 대거 투입하여 미자립 교회 등을 구조조정하고 본격적인 복음운동을 열었으면 한다.

여기서, 한마디 사족을 달자면 1525년 1월 츠빙글리 제자들이 재세(침)례 운동을 시작한 것을 16세기 루터와 칼빈 등의 정통파들이 이단시 했지만 그들은 이단이라기 보다는 16세기식 평가에서도 “급진개혁” 운동이었다. 두들겨 패고, 죽이기를 빈대잡듯이 하니까 급진파로 몰렸지만 그들 재세례파 개혁세력은 현재 캐나다, 미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쉬 이름으로 수천만명의 신도들이 정직하고 순결한 복음운동으로 살고 있다.

또 하나, “대면” “비대면”이야긴데 한국교회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다. 정부의 표현이 약간 미숙하지만 예배당에서 집단으로 모이지 말고, 분산해서 모이고, 최소단위로도 모이라는 뜻이지 혼자서 사막으로 가라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비대면은 최소단위나 영상 예배 정도로 이해하자. 또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교회당 모임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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