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이 쓴 책 <사람의 아들 예수>는 참 재미있는 발상으로 구성되었다. 예수 당시 살았던 사람 75명을 불러, 그들이 본 예수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된 책이다. 그 중 베이루트의 게오르구스라는 사람의 눈으로 본 예수를 그린 대목이 매우 흥미롭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예수를 보았다. 어쩐지 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를 그 전에 본 적은 없지만, 용기를 내어 자기 집에 오셔서 쉬고 축복하여 주시면 좋겠다고 청하였다. 그 때 예수는 ‘아닙니다. 가지 못합니다’ 하고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너무 따뜻하고 굉장한 위로와 사랑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거짓의 말을 하는데도 굉장히 맘이 끌리고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그는 자기 친구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이 사람을 봐. 그는 오늘 이전에 우리를 본 일이 없건만 우리를 자기 집으로 오라 했어. 진실로 내 나라에서는 낯선 사람이란 없다. 우리 목숨은 다른 모든 사람의 목숨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알라고, 알고 또 사랑하라고. 다른 모든 사람의 행동은 곧 우리의 행동이다. 숨겨졌거나 나타나 있거나 말할 것 없이. 나는 너희에게 명령하는데 한 몸만 되지 말고 여러 몸이 되어라. 집 주인도, 집 없는 사람도, 밭 가는 사람도, 곡식알이 땅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 전에 그것을 쪼아먹는 참새도. 감사한 마음을 주는 자도, 자존심과 그렇겠지 하는 마음으로 받는 자도 되어라. 낮의 아름다움은 너희가 보는 것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것 속에도 있다. 이것을 위해 나는 나를 택해준 많은 사람 가운데서 너희를 택했다.”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는 다시 예수에게 자기 집에 오시면 좋겠다고 초청한다. 그 때 예수는 언젠가는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이 말을 네게도 하는 것이니 너도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잘 가거라. 너희 집이 더 넓어져서 이 땅의 모든 방랑자를 재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어려서 살던 시골생활을 기억했다. 그 때는 시골에 여관이나 여인숙 또는 펜션이나 어떤 숙소들이 없을 때다. 머리와 등에 무슨 물건을 이고 지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때다. 그 때 어떤 낯선 사람들이 재워달라고 올 때가 많았다. 그 때는 남자는 사랑채에서, 여자들은 안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 때 나는 참으로 기쁘고 즐거웠다. 그들은 언제나 풍성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고 갔기 때문이다. 그 선물이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서 자기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훌륭한 외부소식이었다.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매우 특이하게 고마웠다. 그분들이 특별히 훌륭한 분들이라서 그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냥 때가 되어 어두워지고 갈 곳이 없고 잠잘 곳이 없을 때 누구나 찾아오는 사람을 내치지 않았던 그것이 그 당시 인심이었을 것이다. 당신들이 나그네 되어 본 적도 있고, 배를 곯아보고 맨 하늘 아래서 잠을 자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잠자리가 그렇게 훌륭했던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그렇게 풍성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낯설고 낯익은 것이 사람을 대하는 잣대도 아니고 태도도 아니었다. 그냥 처지가 그렇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받았던 것이 놀랍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고도 이웃이나 낯선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고 맞아들이는 일상을 살았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생활문화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낯선 것이 너무 많아졌다. 학력, 계층, 스펙, 지역, 종교, 종족, 교파가 다르다는 낯섦, 그러니까 차이가 완전히 낯섦이 되어, 마치 낯섦은 전혀 함께 할 수 없다는 식의 문화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집을 찾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없고, 같이 자고 가자는 사람도 없다. 낯섦은 곧 배척할 대상일 뿐이다. 이러할 때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 것일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악다구니를 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려는가? 우리 사회를 변혁시키기 전에 일단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원수사랑’을, 정말 피나게 살아가자는 운동을 스스로 펼치고, 동맹으로 펼쳐나가야 이제까지 잘못한 것을 회복할 수 있는 회개가 돼야 할 것이다. 점점 신자가 줄어든 때 할 일은 정말 말씀을 십자가로 지고 살아가는 일 뿐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개인도 현실 기독교회도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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