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상기준에서 축하 받으실 일은 하나도 없었다.”

 

오세준 목사
오세준 목사
새누리교회 담임

12월로 접어들면 어김없이 성탄트리가 등장하고 산타 마네킹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풍경을 교회와 아무 상관없는 백화점이나 선물 가게 앞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을 성탄의 의미 전달 시도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다분히 상업적 의도에서 장식물로 꾸미는 것뿐이다. 그리고 “메리 크리마스” “축 성탄” 등의 문구를 써 놓기도 하지만 이 또한 구색 맞추기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면 지나친 폄하라고 생각할까?

“성탄 축하”라는 말을 쓰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성탄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날이다. 화려한 궁궐이 아니라 마구간 구유에 오셨다. 그리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셨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좌천하신 것이다. 그러니 축하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축하”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인사함’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결혼, 출산, 개업, 합격, 입학, 졸업, 취직, 승진, 영전 등의 경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인사 용어가 ‘축하’이다. 그래서 “축하 합니다”는 일상에서 자주 듣고 쓰는 익숙한 인사말이 되었다. 때문에 통념상 좋은 일이 아닐 경우에 “축하 합니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할 성질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상기준에서 축하 받으실 일은 하나도 없었다. 가난하셨고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으셨으니 이게 어디 축하할 일인가? 성탄은 예수님의 이런 삶의 시작이다. 말구유에 오신 것이 이를 웅변으로 대변한다. 하지만 해마다 성탄 축하를 하고 있고 올해도 할 것이다. 

성탄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축하가 아닌 감사와 경배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탄 축하는 감사와 경배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축하는 감사나 경배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구분해야 옳다. 때문에 성탄절은 축하가 아닌 감사와 경배의 날이 되어야 한다. 

성탄절이 이교 문화의 산물이라며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 교파나 부류도 있지만 성탄의 뜻을 되새기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와 경배하는 특별한 날로 보낸다면 영적인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성탄절이 감사와 경배의 날이 되려면 상업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를 배격할 필요가 있다. 연말 분위기와 맞물려 상업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이 결합되어 성탄의 본질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하나가 산타가 주는 선물이다. 

성탄절을 산타가 선물 주는 날로 기억하는 아이들이 많다. 이것이 아이들만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 언제나 아이들이 아니라 성인이 되기에 그렇다. 아이들에게 성탄의 이미지가 산타에 있다면 앞으로 성탄이 얼마나 더 왜곡될 것인지 빤히 보이지 않는가? 

코로나19로 인해 성탄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못하게 되었다고 실망할 것 없다. 어차피 축하 행사가 아닌 감사와 경배의 시간으로 진지하고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성탄 축하”가 아닌 “성탄 감사”라는 말이 더 익숙한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말구유에 아기로 성탄하신 의미를 깊이 깨달아 구원의 은혜에 한 없이 감사하며 경배를 드려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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