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제 3기의 출발점에서…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 도무지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체계, 특히 바울 선생의 탄탄한 신학적 토대에서 이 글이 과연 가능한가? 혹시 바울의 13편 글 중에서 에베소서는 대필(代筆)로 분류되는 것이기에 바울이 감수과정에서 손이 빠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본다.

본문 에베소서 1장 1절에서부터의 흐름을 보면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 이르러서 우리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과장된 말씀이 터져 나올 만하기는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살피면 마땅한 귀결이기도 한다(사도들 전체 역량에서는 말이다).

바울은 일찍이(행 16:7~) 아시아로 가고 싶어 했다. 그의 열망이 지나칠 만큼 간절했다. 성령님과 충돌 직전까지 갈 수 있던 날, 기도 중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드디어 바울의 발길이 유럽을 향해서 떠난다.

역사의 갈림길이다. 아시아 담당은 따로 있었다. 바울은 아시아와 부딪히면 치고받기를 거듭하다가 뜻을 발전시켜갈 수 없었을까? 쉽게 넘어가기가 쉽지 않는 대목들이다. 바울은 그의 신학체계나 성격으로 볼 때 아시아 행이 쉽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바울은 원(圓)이 아니고 선(線)에 가깝다. 아시아는 ‘원’이고 서쪽은 ‘선’으로 형용할 때 바울은 그 체질이 그리스 철학에 바탕한 헬라주의에 가깝다. 하여, 바울은 더 성숙하는 날까지 유럽을 먼저 평정할 의무를 가졌다 해야 할까? 그러나 바울의 영혼은 에베소서를 볼 때 (먼 훗날) 그의 제자들 시대에 이르면 아시아와 유럽을 순환할 수 있는 시대에 가까이 올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대한 해석을 요한복음은 단순 명쾌하게 제시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41~, 48~, 52~).

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5~56). 이렇게까지 예수께서 직접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는데도 역사 기독교는 이 비밀을 아직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다.

겨우 16세기 개혁자들까지 박이 터지고 목숨이 위태로우면서도 화체설과 상징설로 나뉘어서 싸움질만 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6장은 살과 피 이야기는 성찬론에 묶이는 교리만이 아니다. 상징과 비유 속에 담았으나 예수에게 걸려서 넘어지지 말라,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가 장애물이 되어 예수께 나아가지 못하는 기독교 신자들 측은해서 더는 기다리기 힘들다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이 무엇인가? 예수가 되고 예수처럼 살아가는 신자 인생을 말한다. 요한복음 기록자는 은유처럼 상징어처럼 말했다. 그래서 예수의 떡은 내던져버리고 모세의 만나로 예수의 광야 5병2어를 해석하려고 한사코 고집하는 기독교 성경해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배신자요 반역자일 수 있다.

무서운 날이 올 것이다. 2천여 년 동안 예수, 우리의 메시아를 뺑뺑이 돌림(주리 돌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 믿는다는 자들 가운데는 예수교회를 망쳐먹기로 작정한 자들이 기독교 역사에는 수없이 많이 있다.

당장, 긴 말 하지 말고 요한복음 6장을 다시 펴 보라. 정신 차리고 앞뒤 문맥을 살피면서 읽어보라. 요한복음 기록자는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간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도 모세가 다시 나타난 존재가 예수라고 저들은 고집하고 있다(요 6:14 참조). “그 선지자” 정관사(The)를 붙여서 “그”다. 세례 요한을 향해서 그의 신분 추궁을 하면서 “네가 그(The) 선지자냐?”고 묻는 등 예수와 세례자 요한 활동기에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모세의 재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바로 신명기 18장 15절 해석에 집중하다가 요한복음 6장 “하늘 떡 예수”와 “하늘의 만나”를 혼돈하는 해석을 하고 말았다. 예수의 5병2어를 모세의 시나이 광야 “만나”로 착각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다.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 중 상당수가 예수를 모세로 섬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 식 종교”의 범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는 모세 종교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말씀을 쉽게 해석해야 한다. 예수는 먹고 나면 또 먹어야 하는 모세의 만나가 아니라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다시 정리해본다. 하나님의 떡이다, 나를 먹으라! 먹어서 소화시켜라. 나와 예수, 나와 종교는 간 곳 없다. 하나님의 떡(진리)이신 예수를 먹으면 예수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뵙고, 또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해야 할 사명(의무)자를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경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바울은 몸부림치듯이 고백하고 있다. 다시 말해본다. 예수(하나님의 떡)를 먹으면 먹는 그 당사자 (바로 나)가 죽게 되어 있다. 산 독사 한 마리를 입에 물었다면 그 독으로 내가 죽는 법인데, 예수 믿는다면서 또 주여, 주여, 중얼거리면서 제 욕심대로 살기를 바라는 도적놈들을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몰아내거나 제대로 가르쳐서 복음을 복음으로 사는 날이 우리에게 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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