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21세기 이렇게 대비한다 제 3기의 출발점에서…

그 길은 예수부활, 세속어로는 “예수 혁명”의 길이다.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 겨우 지금 수준의 파괴력을 가진 교회를 만들려고 세상에 오셨겠나? 훨씬 더, 충분히 세상을 선두에 서서 이끌어갈 수 있는 교회가 예수의 포부였다. 그 많은 인종 갈등, 빈부 격차, 인권 말살 지구를 단숨에 죽은 돌덩이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 인간들 가슴 속에 가득가득한 증오심들. 아이고! 숨차다!

부활절기, 부활의 예수가 2021년 봄 우리에게로 오고 계신다. 믿느냐? 나를 믿는 자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하신 이 말씀을 너 믿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를 주목하자. 그리고 더는 망설이지 말고 이 말씀을 온몸으로 입으라. 이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자.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1천여 년 간 세계의 중심이었다가 지금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옛 영화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움이란 좋은 것이지만 그리움만으로는 종교의 본분을 다 해낼 수 없다. 1천여 년의 로마제국의 종교를 정지시키고 개혁의 칼을 들었던 16세기 개혁자들의 용맹스러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일구어낸 성과물은 오늘의 세계기독교가 물려받은 축복의 자산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시 개혁자들이 폭력과 동업을 한 것이 커다란 흠이요, 기독교가 세계사 주도력을 상실하게 된 과오로 남게 되었다.

어려운 사안이기는 했으나 16세기 개혁자들은 1525년에 일어난 아나밥티스트 운동과 농민반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하고 또 무지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외면받기를 시작한다. 17세기, 18세기로 이어지는 천재 지성들이 기독교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 시기를 “계몽기”라 할 수 있는데 계몽기가 15세기 후반의 르네상스나 인문주의 운동가들보다는 거칠은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몰랐을까. 드디어 계몽사상가들 중에 무신론 철학군이 형성되고, 반기독교운동,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은커녕 본바닥 유럽에서도 자기 영역을 절반쯤 반기독교 세력들에게 내준 기독교는 1, 2차 세계대전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문제의 해결사는 물론 중재자의 직능도 수행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은 21세기 중턱을 바라보면서 기독교는 세계경영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면서 주변을 기웃거리는 신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내 스스로에게 먼저 부탁한다.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 매달고 있다가 죽어가지는 말자고 말이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서 최후 7일 동안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했던 33살의 예수님을 상기해 보라. 그 시대, 고구려와 백제가 탄생하던 아득한 날의 그 시대, 하나님은 메시아 예수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도 하나님이심을 기독교 신자들은 확실히 배워야 하고, 부활 예수가 믿는 신자의 몸속에 둥지를 틀고 사시는 비밀까지 똑바로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신앙은 창조적 현실이다. 산 자여,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여! 부활이다. 부활 예수까지를 믿으라!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부활 예수와 만난 사람들은 예수와 동반부활체가 된다.

예수의 부활까지를 믿는 신앙, 부활신앙은 다시 죽을 수 없는 단계의 삶을 말하기 때문에 부활신앙으로 준비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죽음이나 실패, 그 어떤 상황의 전개가 내 앞에 펼쳐질지라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이 난다고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16세기 개혁자들이 성급하게 폭력을 행사하였기에 기독교는 반쪽짜리 종교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오늘의 21세기는 제2, 또는 제3의 개혁시대를 열어야 한다. 기독교가 폭력과 결별할 수 있는 길은 부활신앙으로 준비해야 한다.

개혁자들이 왜 사람을 죽이는가? 정통 개혁자로 자리잡은 루터나 칼빈까지도 재세례파 그리스도인을 무자비하게 죽이는데 동의했으며 사실상 그들의 손에도 살인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 재세례파는 당시 로마 가톨릭 프로테스트 간에 양다리를 놓지 말고 가톨릭 신앙, 곧 중세 신앙과 완전 결별을 요구하는 동반 개혁자들이었는데 왜 그들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죽였던가?

농민 반란군 10만 명을 몰살시킨 사실상 책임자가 누구였던가? 1525년 7월 농민군 10만 명을 몰살시킬 때 루터는 그들의 격파를 위한 혈서를 써서 보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어디 사람뿐인가, 생명 가진 모든 생명체들을 괴롭히거나 헤쳐서는 안 된다.(사11장 참조) 폭력에 동의한 16세기 개혁자들,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나면서 루터의 땅 독일 작센주에서 시작된 신구 기독교 전쟁은 당시 독일 영토 전체를 불바다 만들었고, 1618년부터 30년 동안 소위 “30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서유럽 전체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편 가르기 전쟁터였다.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과연 기독교가 제 정신을 가진 종교인가를 의심받기 시작하면서 프랑스를 선두로 유럽인들이 기독교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었다.

제한된 지면이니까 여기서 글을 마치고 싶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매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하여 고뇌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여, 다시 죽을 수 없는 부활신앙의 아들들이여! 오는 부활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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