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준 목사새누리교회 담임
오세준 목사새누리교회 담임

코로나19는 세상의 변화뿐 아니라 교회의 지형까지 바꿔놓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난데없이 비대면 예배라는 낯선 용어가 등장하고 교인 전체가 모일 수 없는 사상 초유의 일을 경험하고 있다. 예배 인원을 좌석의 10~20% 범주로 제한하라는 정부의 지침으로 인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시행하긴 하지만, 이로 인해 타격을 받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다. 그 중의 현실적인 문제가 헌금이 줄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정이 전 같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 교회는 교인 수 감소와 젊은 층의 이탈로 인해 재정 형편이 점점 나빠지고 있던 추세에서 코로나19라는 직격탄을 맞고 헌금이 더 줄고 있어 재정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지만, 헌금이 줄면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헌금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있다. 이런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교회 가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노골적으로 헌금 강요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다. 

한국 교회 신자만큼 헌금 잘 내는 신자를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헌금의 종류도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대부분의 교인은 교회가 정한 헌금의 종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힘껏 헌금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착한 교인이 많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 문제는 헌금의 동기이다. 많은 교인이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한다. 그렇지 않은 교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래서 헌금을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을 목회자의 책임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가 헌금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논리로 가르치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특히 십일조 헌금은 복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단연 백미에 해당한다. 십일조를 드리면 창고에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복을 주신다는 말라기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강조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십일조 헌금을 잘한 교인이 다 이렇게 물질의 복을 받았는가? 십일조를 평생 하고도 가난하게 사는 교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헌금을 많이 못 하는 교인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은혜란 값없이 주는 선물이며, 아무 공로가 없어도 자격이 안 되어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그래서 구원을 값없이 선물로 주셨다(엡 2:8). 구원의 선물은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복이다. 이 큰 복을 거저 주신 하나님께서 헌금을 잘해야 복을 주신다고 하면 이 같은 이율배반도 없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는 동기에서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면 그 헌금은 뇌물이다. 부패한 세상에서는 권력자에게 잘 봐달라고 청탁을 하며 돈을 건네는 일이 흔하다. 이 돈을 뇌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헌금을 드리니 잘 봐 주십시오. 우리 자식들 잘 되게 해주시고, 사업도 대박 나게 해 주십시오.”라는 소원을 담아 헌금을 한다면 이게 뇌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이방 종교에서 만연한 행태를 교회에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방의 잡신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이다.

헌금이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반응하는 것으로 감사의 표현이다. 뇌물의 성격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신 10:17, 대하 19:7). 그러므로 더 이상 “복을 받으려면 헌금 잘하라. 십일조 온전하게 하라.”라는 식으로 헌금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헌금을 복이라는 미끼로 악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곱씹고 곱씹어 깨닫게 되면 뇌물로써의 헌금은 사라지고 참된 헌금으로 교회 곳간이 채워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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