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유대교를 왜 이토록 무자비하게 혐오하고 박해하는가? 또 하나는, 왜 기독교는 절대 유일의 종교 신분으로 “이슬람”을 다시 가르치고 사촌의 예로 대하지 못할까? 또 삼위일체론을 힘으로 왜 강요하는가?

 

60여 년 전 세계교회사를 읽었다. 그때 필자는 신구약 통독 10회 정도의 공부 진도가 있던 때였다. 세계교회사 독후감은 “매우 위선적이고 비겁하다”는 결론이었다.” 겹따옴표 안에 담은 필자 독후감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19살 때의 필자 평가는 60여 년 지난 오늘도 변함이 없다.

“들소리” 깃발을 내걸고, 필자는 반쪽짜리 기독교사를 온전한 기독교로 방향을 잡도록 노력해왔다. 이 싸움 아닌 싸움을 해오면서 60여 년 동안 필자 인생은 만신창이다. “들소리” 초기에 선후배들이 필자에게 주는 충고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너의 신세만 고달프게 될 거야’라고 했을 때만 해도 필자는 귀 넘겨들었다.

그러나 이제 흘러간 세월은 어찌 하는가? 필자가 지금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은 쟁점 하나는, 기독교는 유대교를 왜 이토록 무자비하게 혐오하고 박해하는가? 또 하나는, 유대인 혐오의 1차 반동은 아라비아 이슬람 등장과 반(反) 기독교 세력화를 보면서 왜 기독교는 절대 유일의 종교 신분으로 “이슬람”을 다시 가르치고 사촌의 예로 대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쟁점은 삼위일체론을 힘으로 왜 강요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이 세 가지 쟁점을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다면 21세기 기독교는 청신호를 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두 눈에 불을 켤 수도 있겠으나 필자 생각은 상당히 쉬운 답변으로 오해를 풀어갈 수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 문제는 간단하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신 메시아 예수를 살해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에 달려야 했을 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는 세력과 예수는 선지자요 의인이라는 유대인들 중 살인자 세력이 더 많지 않았었다는 자료가 만만치 않다. 이뿐 아니라 신명기, 시편, 이사야서를 신뢰하는 구약인들의 정통성 또한 예수 편이고, 또 예수는 구약의 모리아 대속(代贖) 씨앗이 성장하여 골고다 예수로 인류 구원 완성자이다.

이슬람 문제는 어떤가? 아라비아 초기에 대처만 잘 했어도 이슬람은 기독교의 형제 종교가 될 수 있었다.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은 서로 관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삼위일체론을 보면, 초기 원(原) 사도 세력의 집결인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이방 선교팀에 의해 “유대파 기독교”로 몰리면서 단계적 삼위일체 과정이 꼬여버렸다. 이스라엘 민족은 삼위일체 교리가 없었어도 하나님 본체 안에 있는 성자와 성령의 기능 조화로 메시아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불러낼 수 있었다.

끝으로 또 하나, 프로테스탄트(신교)가 가톨릭 교단을 동반자로 보지 않는 해괴한 사안이다. 로마 가톨릭 2천여 년 가까운 역사를 보라. 특히 16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 서양사의 로마 기독교의 과정을 살펴보면 천신만고의 세월이다. 특히 샤를레망 대제768-814)체제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들의 무능과 부도덕은 눈 뜨고 보기 힘들었었다. 신성로마의 오토대제가 962년 등장하기까지 100여 년 동안 “중세 암흑기”였고, 이밖에도 “연옥설”, “성직 매매”, “면죄부”, “성모 마리아 숭배” 등 정통 기독교가 시비할 수 있고 거부할 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그러나 서고트족 알랄릭 추장의 성 베드로 예배당 침탈(AD 400년~)과 로마 제국이 게르만의 오토 아케르에게 무너진 AD 476년 등 중세 초 무정부 상태, 무지하고 망령된 게르만 세력을 기독교로 순화 정착시키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특히 AD 732년 투르전투, 칼 마르텔이 스페인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유럽의 심장부인 프랑크 왕국 파리로 진격하던 우마이야 칼리프 이슬람을 격퇴하지 못했으면 오늘의 유럽 기독교는 없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추정은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동의한다. 어디 이뿐인가? 콘스탄티노플이 아라비아 사라센 이슬람, 셀주크 투르크 세력을 방어해주지 않았다면 세계 기독교 역사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유럽 기독교 세력이 10세기 이전에 모두 이슬람의 터번 앞에 무릎을 꿇었을 터이니까.
아, 역사여! 역사의 진전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 못지않게 순결했던 내 믿음의 어머니들이 마치 늙은 창녀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다고 해서 그 어머니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1천년 이상의 긴 역사 속에서 교부시대까지의 정통씨앗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냈다가 16세기 종교개혁 세력 앞에 바친 로마 가톨릭을 저주하고 욕만 하고 있어도 될 일인가?

셈족의 조상, 유일신 신앙의 아버지,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바치면서 골고다의 터를 닦은 아브라함의 자식들, 유대교, 이슬람, 형제인 가톨릭까지를 초기 신앙의 정통성을 지켜낸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품어주고 다독여주면 이 세력이 대략 40억 명, 지구인 70억 정도의 과반수가 넘는다. 더구나 기독교를 중심한 유일신 신앙의 자식들의 영향권을 10억 명 이상으로 볼 때 세계인 70% 이상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또 영향력 안에서 인류의 현재와 앞날을 위한 유토피아가 아니고 창조의 연속선상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대략 이런 기본적인 신앙적 포부를 지켜내면서 오늘은 물론 앞으로도 하나님의 무릎 아래서 그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다.

필자는 순진하고, 바보스러운 신앙과 신학적 포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원하고 모든 동역자와 신자 그리스도인들의 관용과 은혜를 기다리겠다.  마치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금식과 기도로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낳은 지 8일된 메시아 예수를 뵈옵기(눅 2:25~)를 살아서 기다리는 은혜를 원한다.

필자는 이에 더하여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고 또 다른 시므온의 노래 부르며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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