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인문학에 요즘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르네상스, 17세기 후반 서유럽에서 제2의 르네상스가 계몽 철학기 이름을 등장했고, 21세기 중반에 인류는 제3의 르네상스 시대를 말하고 있다.

역사과학자 스티븐 핑거는 “다시 계몽기”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인류가 다시 한 번 더 진보의 선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핑거의 도움 아니고도 지금 우리 사회는 인문학 중흥기에 들어섰다. 

교회들은 크고 작은교회 상관없이 인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과 찬송가 외에도 자기들의 함께 읽고 토론할 책들을 가지고 교회 그룹모임에서 만나는 젊은 층이 많아지고 있다.

매우 반갑고 장려할 일이다. 후기 중세의 카페문화를 닮아간다고도 할 수 있기도 하며, 한국교회도 도시문화의 깊이에 젖어드는 과정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인문학과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의 대소 각성기, 또는 후기 각성기까지만 해도 갈등관계였다. 마치 종교개혁기의 에라스무스나 루터와의 관계처럼, 종교개혁 후기의 데카르트나 볼테르가 야콥 슈페너나 진센도르프와 마주쳤다면 어떨까 하는 떨떠름한 시대도 있었으나 요즘 교회 청소년층, 즉 중고등학생들은 한국의 한 시대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한국교회도 빌리 그래함이나 조용기 스타일의 시대를 한 번 더 생각하면서 교회의 전승과 인문학의 19세기적 난코스를 뛰어넘는 학습기술을 보편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서양신학 전문코스를 마친 유학파들 중에 한국교회는 계몽기 세례를 받지 못한 지도자들 때문에 한 수준 뒤늦었다고 비웃었으나 이제는 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이 인문학 서적을 쉽게 뒤적이면서 “인문학과 계시의 거리”까지도 가늠해보려는 용기를 내고 있다. 시대의 변화이다. 교회의 발전이기도 하고, 뒤늦게나마 한국교회도 천동설을 뛰어넘는 지동설 시대의 도래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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