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그 주변 사람들-2

왜 임금 삼으려 드는가? 
예수를 모세로 변형(변장)시키려는가?
실제로 세계 기독교는 
요한복음 6장 예수의 우려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로 둔갑시킨 지 오래다.
그래서 모세만큼 

시나이 40년 만나에 멈추지 않고 
4천년이 다가오는데도 
그 만나로 인류 모두의 메시아 예수 열망을 차단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의 비밀

암시나 힌트는 늘 가까이에 있다. 이게 정석이고 정설이고는 말하기가 쉽지 않아도 모두 웬만큼 살아본 사람들은 자기 경험 속에서 가능하다. 아무래도 요한복음 6장에서 시비로 폭발해버린 이 사건은 예수의 복음 활동에도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 요한복음 집필 순서와 편집 기획 상으로 볼 때 이 복음의 기록자가 예수를 표현하는 데 암시가 숨겨져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자는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장난꾸러기요 심술꾸러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6장의 경우는 장난기 섞인 표현이 아니라 그가 터득한 예수의 비밀을 자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6장 이후, 예수는 제자와 군중을 이끄실 때 하늘나라 내용을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7장으로 가면 질투하고 불신하는 동생들의 응석 같은 시비를 들어주다가 어느새 그는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 군중들 한복판에 서 있다.

그때의 정황을 보면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파견한 “예수 체포조”에 둘러싸여 있다. 잡아가야 한다는 강경파, 예수를 지지하는 세력을 얕잡아볼 수 없다는 온건파들의 눈치 싸움 한복판에 있다. 예수에게 모세의 떡(만나)을 내 놓으라고 아우성치는 시나이 광야시대의 버르장머리나 성전 유대인들의 영적수준을 살펴보면 오늘 21세기 중턱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들도 함께 부끄러워야 할 것이다. 

8장으로 건너가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연인을 구하려다가 낭패를 당하고 유대교 열성파들의 집단테러를 피하여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야기, 10장은 양의 문 앞에 선 목자이야기, 11장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 그리고 12장 13장은 마지막 만찬장으로 이어지더니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로, 14장 31절은 겟세마네 문턱이다. 

요한복음 6장에 떡을 내놓으라고 고함지르며 덤벼드는 유대인들의 초라한 모습 같은 꼴들도 우리는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대화의 주제 ‘떡’

역사상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와 비켜 선 이후에도 더는 먹고 사는 1차 생업수단으로 어느 누구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세계경제의 핵심브레인들은 유대인들이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만약 요한복음 6장에서의 충격으로 예수께서 더는 군중 또는 진리를 구하는 자들의 교사로 나서지 않고 십자가로 달려간 것이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는 기적으로는 실패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승리하였다고 하였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다. 혹시 예수를 향하여 폭력적 언행을 행사하는 본문 요한복음 6장의 상황을 빗대어서 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본문의 광야의 보리떡이 더 필요한 유대인들이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었을까?

예수께서 저들 광야의 유대인들을 가볍게 본 것은 아닐 수 있다. 6장 3절 이하를 보면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로 시작된다.

제자들과 산 위에 올라 그들을 가르칠 시간이다. 유월절을 앞둔 교훈의 시간이었을까? 그때 저 건너편 산허리에 큰 무리가 예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예수는 제자 빌립에게 광야의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먹거리를 준비시킨다. 이것은 제자들과는 유월절 대화다. 유월절 대화도 떡이다. 유월절 유래를 볼 때 모세를 지도자 삼고 이집트 땅에서 노예생활 하던 유대인 전신인 이스라엘 시대, 무려 4백여 년간 이방의 노예살이 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지도자 모세)를 만나서 노예의 땅 이집트를 떠나던 날 밤 기록이 유월절 절기의 출발이다.

 

떡에 대한 몰이해

예수는 광야 유대인들에게 넉넉하게 먹고 마실 것을 주었는데 15절에서 예수의 심기가 뒤틀린다. 요한복음 표현으로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6장 사건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6장 후반에서 예수의 비밀이 노출된다. 이 비밀을 일부러 노출시키거나 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비틀어서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6장 비밀이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다는 기적 같은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필자는 지금 접근 중이다.

왜 임금 삼으려 드는가? 예수를 모세로 변형(변장)시키려는가? 실제로 세계 기독교는 요한복음 6장 예수의 우려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로 둔갑시킨 지 오래다. 그래서 모세만큼 시나이 40년 만나에 멈추지 않고 4천년이 다가오는데도 그 만나로 인류 모두의 메시아 예수 열망을 차단하고 있다. 

이 분명한 증거가 예수의 분노에 찬 발언에 나타난다. 그를 붙잡아 임금 삼고자 한 떠돌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담보로 평생 거지로 살 작정을 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저들 예수 임금 추대를 노리는 자들의 음계를 피하여 몸을 숨겼으나 이틀 이상은 숨지 못하여 저들 열심파에게 그의 위치가 노출되었고, 그곳에서 벌어진 사태가 본문 줄거리의 핵심이고 열쇠로 숨겨져 있다.

이야기가 확대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떡은 모세가 준 것이다, 모세가 주었다 하지 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 그 떡을 내 놓으라고 다그치는 광야의 거지 떼 유대인들의 요구 앞에서 예수는 “내가 바로 그 떡!”이라고 선포한다.

깜짝 놀란 유대 땅 거지들이 분노한다. 어떤 이들은 쇠몽둥이를 들고 예수께 덤벼들면서 미친놈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지난번 예수의 도움으로 앉은뱅이 장애를 고침 받아 건강을 뽐내는 중년 여인은 예수에게 구정물 통을 내던져버리면서 저 놈이 선지자인 줄 알았더니 귀신들린 놈이네 하면서 침을 뱉기도 하였다.  

갑작스러운 사태, 초기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본능적으로 예수를 지키느라 진땀을 흘렸으나 시간이 가면서 인심은 예수에게서 유대 광야의 순례자들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자들이 망설이는 사이에 예수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 몸을 지켜야 하는 체통 구겨지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 틈새를 놓치랴. 분노로 가득 찬 배고픈 광야의 이리 떼 같은 모습을 한 사내들 한 떼가 예수를 한순간 움켜잡았다. 제자들 일부가 손을 쓴다 했으나 늦었다. 예수는 있는 힘을 다 해서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다. 

“이놈아, 우리가 사람 잡아 먹는 광야의 늑대냐? 우리가 피를 빨아 먹는 마귀냐? 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는 말로 우리를 조롱해!

예수의 목덜미를 잡은 중년 사내의 눈빛과 예수의 눈이 마주친다. 그 중년 사내의 자신감 없는 눈빛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예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이보시게들, 맹목이야. 여러분의 분노, 배고픔, 가난, 질병, 지쳐버린 메시아 내림에 대한 기대는 헛된 꿈이고 망상이야.” 속삭임이다. 예수의 가슴 속에서 타는 소원이고 탄식이다. 사람들의 목마름. 맹목 같은 일상….

어느새 예수 주변에서 행패 부리는 자들이 자리를 뜨고, 예수 멱살을 잡고 잡도리를 치던 사람들도 제풀에 지쳤는지 한 발씩 물러선다. 

 

  스스로 살아나올 수 있기를

‘먹어도 다시 배고픈 모세의 떡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주신 참 떡이 있는 데 그게 나다. 내가 떡이야. 너희가 먹고 다시는 베고프지 않을 떡, 제대로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물이야.’

여기까지에는 좀 더 듣고 배울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 6:41)”이라 하시므로 문제가 확대되면서 당시 갈릴리 건너편 지역의 갈등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문제에 대한 힌트가 필요하다. 당시 유대의 순례자들 떡은 예수 자신이 영생의 떡이요 물이라 하여 예수를 배우고 따르면서 메시아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는데 어느 시간에 예수 자신이 그걸 막았고, 오늘의 기독교가 요한복음 6장의 예수의 살과 피를 성찬식 순서의 근거 정도로 치부해 버림으로 복음서 전체 중 가장 난해하면서 또 가장 쉬운 이 과제를 기독교는 물론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내던져 버린 것이다. 

‘떡은 먹고 물은 마시라!’

내가 하나님의 떡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 내 피는 참된 음료라 하시는 말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끝없는 자기변명으로 거기 절대의 그곳에 접근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른 척 하는 것은 예수처럼 살고는 싶지만 예수처럼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은 싫어서일까? 아니면 참으로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6장에서 제자들도 예수 곁을 떠났다. 오죽하면 “너희는 안 갈 거지?”(요 6:67)라는 다급한 예수의 숨 가쁜 표현법까지 역사에 남아 있을까(헬라어 표현법에 의하면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께서 제한한 흔적이 보인다). 

예수는 왜 요한복음 6장의 모험을 시도했을까? 기독교를 역사 속 또 하나의 종교로 남기자는 뜻은 아니었을 것, 그보다는 기독교가 세속 속에서 또 하나의 종교 꼴을 하면서 예수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저마다 자기 알을 깨고 스스로 나오지 않으면 그 생명을 보장받기 어렵다.  

스스로 살아나올 수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 난폭한 군중들로부터 크게 망신을 당했다는 억울함이 아니라 그토록 충격요법까지 동원한 요한복음 기법으로도 인류는 아직 이 대목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가 자기 스스로 문을 열어야 하는 법이니까. 설사, 1만년은 더 기다릴지라도 예수의 양보는 없을 것.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못난 인간들까지도 하늘나라 최선의 빈객노릇 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참으로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찌하나. 어려운 것 쉽게, 쉬운 것은 어렵게 가르친다는 평가를 감수하는 예수의 고집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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