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들소리 창업 45주년 기념

조효근 목사 (들소리신문 설립자, 발행인)
이영훈 목사 (거룩한씨성동교회 원로)

우리는 서로의 선교와 목회에 대하여 많이 알고 또 긴밀한 협조도 해 온 관계인데 조 목사님 리드하는 ‘들소리’가 긴긴 45년을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 있음 그 자체만으로 기적이기는 하지만 그 고생을 하면서 인고(忍)의 날들을 살아온 또 다른 뜻은 없을까요?

 

조효근 목사/들소리 설립자이자 발행인
                                                           조효근 목사

 조효근 목사(들소리신문 발행인 ) 1970년 3월 7일 성결대 3학년 강의실에서 첫 만남이었으니 52년 하고도 5개월 째 우리는 우정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영훈 목사(거룩한씨성동교회 원로)    무슨…? 

 조   이 목사의 초기 인상인 데, 뭐 저런 딴따라가 신학을 한다는가 하고 당신의 태도를 불성실하게 보았어요. 배호의 노래를 좋아하는 트로트 지망생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덜렁거리는 모습에서 뭐 저 따위가 다 있느냐고 나는 불쾌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깜짝 놀랄 사건이 터진 겁니다. 그때 나는 옥수동 매봉산 꼭대기 무허가 집에서의 창고에서 살고, 이 목사는 조금 좋은 지형에서 개척교회를 할 땝니다. 아침 6시 쯤 나는 물지게에 공중 수돗간에서 물통을 지고 산중턱을 오르는데 이 목사가 부스스한 모습에 옆구리에 담요 한 장을 꼬고 내려옵니다. 산동네 교회당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난 그날 아침의 충격, 딴따라가 단숨에 경건한 목회자 후보생으로 신분 상승했습니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더군.

 이   아, 참. 별걸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만하고 본론을 말해야죠. 45년 기념 대담자로 나를 선택했으니 내가 하나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선교와 목회에 대하여 많이 알고 또 긴밀한 협조도 해 온 관계인데 조 목사님이 리드하는 ‘들소리’가 긴긴 45년을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 있음 그 자체만으로 기적이기는 하지만 그 고생을 하면서 인고(忍苦)의 날들을 살아온 또 다른 뜻은 없을까요?

 조    글쎄요. 없진 않으나 이 지면에서 그걸 다 말한다는 것이 좀….

 이   그런가요.

 조     아, 이건 하나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구약 이사야 선지자의 길을 따라 소명을 받았고 신약 세베대의 아들 요한, 그 사람의 복음서를 방향키로 삼아서 선교인생을 살아가고 있죠. 내가 고생고생 하면서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은 이사야 11장과 53장을 요한복음으로 이어받는 삼중장치화된 복음의 비밀을 계시의 눈으로 살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구 어려워라! 이사야 11장, 53장, 요한복음이 ‘들소리’의 비밀복음이라고 되는 것인가요?

 조   천만의 말씀입니다. ‘들소리’가 무슨 비밀복음을 가졌나요. 자칫 그 같은 말씀이 잘못 전달되면 내 가냘픈 목숨 금방 날라 갑니다. 

이영훈 목사
이영훈 목사

 이   약한 척 하지 마세요. 나는 조효근 목사의 이 당돌하고 때로는 무서움을 느낄 만큼 겁 없는 말을 쏟아 놓을 때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답니다.

 조   뭐라구요? 이영훈 목사님은 내가 무슨, 흔히 하는 말로 “비밀복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까?

 이   아니오, 아는 바 없어요. 그런 의심 없어요. 다만 이건 있습니다. ‘들소리’가 20주년 무렵부터 거의 매년 창립기념 행사를 해 온 줄 압니다. 그때마다 나는 초청받았죠. 때로는 맘이 내키지 않을 때가 있었으나 그래도 친구의 심정을 가지고 참석하곤 했지요.

 조   그래요? 그럼 주로 동정심 따라서 했다는 건가요?

 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행사 때마다 거의 내 마음에 아쉬움을 남기곤 했던 기억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이사야 11장, 53장으로 말길을 열어가던데 어딘지 모르게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다하지 않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식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점이 내 눈에 보였지요. 더 쉽게 말하면 뭔가 말하려다가 꼬리를 감추는 식이라고 할까.
 

루터나 칼빈의 교훈을  성경의  정경성 받들듯이 하고 있는 

기성교회는 예수님이나 세례자의 눈에는 눈 먼 소경처럼 보였던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들 수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들 수준

 조   이 목사님의 수사학적 화법이 오늘 따라 빛을 발하는군요. 이 시간 여기서라도 내 입을 열게 하려는 집요하고 끈질긴, 참으로 용의주도하십니다. 그렇게 간절하시다면 내가 못 이기는 척하고 한 말씀 드리죠. 이는 이 목사님께만이 아니고 그 행사의 날에 참석하셨던 축하객, 또는 들소리, 들소리신문 독자들께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받은 은혜의 무게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에요. 저는 요한복음 강좌를 20살 무렵부터 수천 회 해왔는데 초기에는 요한복음 6장이 지나면 더 듣지 못하겠다는 요청에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둬야 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어요. ‘들소리’ 시작 후에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으나 늘 조심성을 가져왔지요.

 이   그래도 관록이 넘치는 지금은 다르잖아요. 말씀해주세요.

 조   이사야 11장 6절 이하에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가 있고, 53장 1절 이하에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예수를 표현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두 구절은 만남입니다. 11장의 가치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라 마치 천년왕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할 만큼인데 11장으로 가는 길목인 53장은 제2 이사야, 곧 11장을 기록한 이사야보다 150여년은 늦게 세상에 태어났을 이사야의 글입니다. 또 두 사람이 단일 이름을 사용하지요. 자기의 선배일 뿐인데 제1 이사야 앞에서 자기 이름마저 지워버린 53장 이사야와 11장 이사야의 품격과 신앙의 수준을 높이 바라보면서 ‘들소리’(이는 본디 조효근의 아호임)는 이사야의 수준을 목표로 하는 신앙운동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방법론을 찾으면서 예수 제자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그래도 이사야를 알고 있는 유일한 제자임을 발견하고, 신약시대마저 마감에 쫓기는 종말기의 오늘도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이사야와 요한사도를 뛰어 넘겠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늘 무엇인가 해야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세월을 만지작거리면서 때를 기다리는 ‘들소리’가 되었지요.

들소리 창간호 표지

 이   그래요. 그럼 비밀교리가 맞네요. 그렇다면 그 비밀을 이제는 열어야 하겠군요?

 조   뭐요? 왜 이렇게 내 심장에 갈퀴질을 하는 겁니까? 당신은 대단한 검객이나 탐정 같군요. 그러나 당신의 유도심문이 아니라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발언을 하여 “들소리 본색”을 드러내려고 작심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금년에 은퇴하려다가 5년,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5년 더 일선에 서서 만고창파를 일엽편주로 헤져가는 사공노릇을 하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저는 누가복음 2장 유월절 날 성전에서 12살 예수께서 그의 모친과 부친에게 했던 말을 알고 있지요. 그때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눅 2:49) 하십니다. 기가 막힙니다. 아직까지 미성년자인 예수가 그의 부모 따라 예수살렘 유월절 행사에 왔다가 서로 길이 엇갈려서 사흘 동안이나 안부를 모르고 찾아다닌 부모 앞에서 하는 말투가 심상치 않군요. 어쨌거나 예수는 그날 곧 12살 이후 30살 갈릴리 해변에 나타날 때까지 기록이 없어요. 심오하고, 심각한 그의 영적 내면의 성장기요 때를 기다리는 자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18년 침묵은 망설임과 두려움의 시간들 아니었을까요.

예수 제자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그래도 이사야를 알고 있는 유일한 제자임을 발견하고, 

신약시대마저 마감에 쫓기는 종말기의 오늘도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이사야와 요한사도를 

뛰어 넘겠다는 포부를 갖게 돼  


저는 지난 ‘들소리 45년’을 12살 예수와 30살까지의 과정처럼 생각합니다. 성숙, 숙성기였습니다. ‘들소리’ 창간호를 보신 분은 확인할 수 있는데 창간호 1면에 ‘들소리 연습’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드디어 저는 오늘 이 대담을 나누는 45주년 호부터 “~연습”에서 “연습”을 떼어 냅니다. 연습을 훈련시대로 끝내고 본격시대로 이동합니다. 

 이   왜, 흥분하십니까? 저는 왜 들소리여아만 했는지, 가 궁금하고, 또 창간 기념식 날도 들소리의 자기 존재를 다 말하지 아니한 그 많은 기념 행사 날들의 의미를 추궁하는 겁니다. 

 조   그래요. 알겠어요. 제가 기성교회에 깊이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기존의 교회들은 출구가 막힌 상태요, 하나님의 계시사를 책임질 소명이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그런 겁니다.

 이   잠깐 말을 끊습니다. 기성교회를 불신하는 겁니까?

 조   아니오. 다만 계시사의 주류에서 이탈해 있다고 봅니다. 루터나 칼빈의 개혁역사는 제2, 제3의 루터나 칼빈이 이어져야 하는데 마치 루터나 칼빈의 교훈을 성경의  정경성 받들듯이 하고 있는 기성교회는 예수님이나 세례자의 눈에는 눈 먼 소경처럼 보였던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들 수준이라고 봅니다. 

 이   아 그렇군요. 거기에 무서운 음모가 들어있군요. 그래서 오해를 하는 이들도 더러 있는데 그럼 교회들의 우려가 빗나간 것은 아니로군요.

 조   어허, 이영훈 목사님! 사람을 잡으러 드시나요.

 이   변명하지 마세요. 기성교회들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취급하고 있지 않소?

 조   바리새인이 무조건 나쁩니까?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 예수의 제자들과 또 다른 당시 인물들 모두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요 엣세네 등등 남은 유대 계층들이잖아요. 그들 유대-이스라엘은 비록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예수와 예수의 세계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여기 이 대목을 잘 들으세요. “들소리운동”이 별도의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고, 또 ‘들소리’가 지적한다고 기성교회들이 다 쓸모없는 것들이 되나요.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을 이해해 주셔야 “들소리45년”의 가치가 보존되고 긴 기간 동안 ‘들소리’를 받아 읽으면서 신앙에 보탬을 가졌던 독자와 회원들이 소중한 존재들이 됩니다. ‘들소리’는 지금까지 나의 신앙고백과 차이가 있는 젖이나 먹는 어린 신자들을 차별하지 않겠다 했으나 그게 잘 되지는 않았어요. 때로는 차별했죠. 그러나 ‘오늘부터’는 다릅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   무슨 말인지….

예수는 12살 이후 30살 갈릴리 해변에 나타날 때까지 기록이 없어요. 심오하고, 심각한 

그의 영적 내면의 성장기요 때를 기다리는 자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18년 침묵은 

망설임과 두려움의 시간들 아니었을까요. 지난 ‘들소리 45년’을 12살 예수와

30살까지의 과정처럼 생각합니다. 성숙, 숙성기였습니다. 
 

 조   제가 조금 더 성장했다는 뜻이죠. 저는 여러분과 똑같이 만들어지고 있는 하나의 작품, 예수의 손에 들려진 흙덩이 하나일 뿐입니다. ‘들소리’ 사람들은 그래서 나의 선생이요 친구요 형제들입니다. 다만 주 예수께서 기다리시는 푯대, 결승점까지 달려가는 형편은 각각이겠죠.

 이   그래요. 그럼 조 목사님은 결승점까지 갈 자신이 있나요?

 조   글쎄요. 그건 모르겠는데,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서 달리고 있는 줄은 압니다. 혹시 올림픽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를 아시는지요? 그가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유력 후보군에서 뛰고 있었지요. 마라톤 코스 35km지점인 몬주익 언덕을 오르고 있었어요. 바로 여기서 선두가 거의 결정된다더군요. 언덕을 오르는 과정에서 대부분 우승 후보들도 탈락하고 이 언덕을 거뜬히 오르는 선수가 금메달 가능성이 있는 지형이래요. 

그날 밤 방송 중계를 듣던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안을 돌기 시작했어요, 밤 8-9시 쯤으로 아는데 미친놈처럼 방안을 뱅뱅 돌았어요. 내가 보내는 기운이 황 선수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었어요. 아마, 우리나라 시청자들 중 거의 대다수가 황 선수를 지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드디어 이 언덕 내리막으로 방향을 잡을 때 황 선수는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어요. 멀리 메인 스타디움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황 선수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선수가 되었어요.

나는 지금 황영조의 몬주익 지점을 달리고 있어요. 내게도 지난 60여년 나의 신앙생활을 격려하고 성원하고, 동행의 기도를 많이 해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복음의 승리를 위하여 수없는 날들을 위험과 고난을 이겨내며 2022년에 이르렀는데, 바로 내게는 지금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마의 지점인 몬주익 언덕을 오르고 있어요. 여기서 무너지기 싫어요. 주 예수께서 기다리시는 작지만 정확한 예수의 꽃이 되고 싶어요. 이영훈 목사 당신은 물론이고 나의 믿음승리, ‘들소리’ 독자와 회원들의 신앙승리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기독교는 예수께서 바라는 바를 따르지 않고 있어요. 특히 한국교회는 1천만 명, 여기에 가톨릭까지 동반자로 부르면 1,500여만 명의 예수 군사들입니다. 이들이 인격, 지혜, 재력들을 모아서 교회들의 품위를 끌어올리고, 사회현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가톨릭과 연합하여 공동의 인력, 재력, 지혜까지 모아서 스스로의 품위를 끌어 올리고, 사회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 잡고, 중국이나 러시아에게도 한 쪽으로 기울지 말도록 강력한 힘의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이 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통합적 해석을 해보면 삼위일체, 정치, 경제도 삼위일체론과 같은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어요.

 이   잠깐, 너무 많이 나가는군요. 가톨릭과의 연대도 조심스런 표현이어야 하고, 삼위일체, 정치 경제를 ‘신 삼위일체’로 말하다가는 자칫 몸 상하는 수 있어요. 

 조   몸이 상해도 괜찮아요. 앞으로는 몸 상할 일만 남아 있어요. 이사야의 마지막도 톱으로 켜 죽이는 형벌에 의해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고, 요한 또한 산 순교자입니다. 또 제가 지금 만 80살입니다. 해방 전에 태어난 사람의 80살은 100살과 마찬가지입니다. 몬주익 언덕에서 결승점까지 무사히 레이스를 마쳐야지요. 

그리고 기독교와 가톨릭은 본디 하나입니다. 가톨릭 안에 있는 미신 부분을 파헤쳐내고, 신·구 기독교가 만나서 공동의 선교를 못한다면 두 종파 모두 주 예수께 혼쭐이 나게 될 겁니다. 공산당까지 품어준다는 기독교가 가톨릭과 형제 될 수 없다면 위선이고 거짓이죠.

신 삼위일체론은 응용해 보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정치 모르고 경제도 모르는 식으로는 미래 시대를 감당하지 못해요. 미국이 세계 일등국이 된 것은 메이플라워호  필그림들이 보스톤 플리머스항에 도착했던 1620년부터 1776년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약 150여년을 성경공화국(The Bible Republic)이었어요. 교회가 자치공화국으로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의 미국이 된 겁니다. 

 이   네, 네! 알겠어요. 몬주익 언덕의 승부수를 둔 황영조 선수처럼 조효근 목사도 기존 기독교를 향한 도발을 본격화하여 자기 영역을 확보할 계획인 듯하네요, 지금 내 귀에는요. 그러나 삼가하고 또 삼가하십시오. 기독교가 그토록 허술하고 만만한 종교가 아니오. 조효근의 논리 앞에서 빈틈을 보일만큼 약하지 않소. 늘 겸허해야 하오. 

 조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19살에 받은 은혜 60여 년 동안 변죽을 울리듯이, 허공을 치듯이 조심하면서 승부처를 노렸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본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38)는 말씀에 이끌리어 구도의 길에 나섰는데….

 이   그래, 말씀을 이어 주시죠. 그럼 승부처를 찾았습니까?

 조   네. 찾았어요. 나를 무릎 꿇려야 하오.

 이   어허, 왜 그리 살벌한 말을 하나요.

나는 지금 황영조의 몬주익 지점을 달리고 있어요. 내게도 지난 60여년 나의 신앙생활을 

격려하고 성원하고, 동행의 기도를 많이 해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복음의 승리를 위하여 수없는 날들을 위험과 고난을 이겨내며 2022년에 이르렀는데, 

바로 내게는 지금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마의 지점인 몬주익 언덕을 오르고 있어요. 

여기서 무너지기 싫어요. 주 예수께서 기다리시는 작지만 정확한 예수의 꽃이 되고 싶어요.

 

 조   시간이 없어요.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어요. 기독교는 유대교회와 원수 되어 있고, 이슬람과도 상종 못할 관계이고, 앞서 말한 대로 로마 가톨릭은 함부로 대하는 등 도무지 성장할 기미가 보이지 않소. 그래서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버티고 있는 ‘들소리’는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승부의 칼을 뽑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더 낮은 자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유대교, 이슬람, 가톨릭, 더 나아가서 세상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화해를 하고 싶어요. 

다시 말하면 지금 나처럼 더 높은 수준의 신앙목표를 가지고 몸부림치는 구도자나, 아직 미숙하고 나약한 사람들, 더구나 위선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기독교 사람들 마치 지진아처럼 안타까운 사람들을 한결 같은 눈으로 대하는 자세가 부족한 당사자가 나 자신임을 이제야 발견했소. 그래서 자신이 밉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를 이제야 해석하게 되었소. 이제는 속지 않고, 몬주익 언덕까지 이끌어 주시는 예수를 따라서 승부수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   그만, 그만합시다. 조 목사님의 말이 갈수록 어려워지네요.

 조   그래 그런가요. 걱정 마시오. 내 말은 거칠어도…. 그런데 오늘의 대담 게스트는 누굽니까? 조효근, 아니면 이영훈인가요? 공동 질의 동동 답변이면 좋았는데 내가 너무 심했나, 아무튼 오늘 대담에서 거친 표현도 있지만 나 자신과의 마지막 전쟁터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향한 ‘들소리’의 애정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들소리 45년 돌이켜보면 주님과 엠마오로 내려가는 긴 시간도 있었으나 너무나 많은 분이 이뜰어 주시고 함께해 주셨습니다. 긴 세월을 변함없이 들소리가 되어준 양승록 목사는 나의 그림자였고, 순간 나도 그의 그림자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사로서, 후원회원으로, 뜻을 함께하신 독자들 모든 분이 들소리입니다. 이 시대의 들소리들에게 주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들소리는 행복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었고 나라임을 확인해 보며 축하드립니다. 

 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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