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모리아에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신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이라는 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했으나 이제는 죽음이 보인다. 죽음이 눈에 보인다하니까 입방정 떨지 말라는 친구들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죽음이란 생명을 더욱 값지게 하기 위한 마지막 배움의 과정이다.

나는 누가복음 2장,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의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를 믿음의 초부터 눈여겨보고 있다. 대단한 인물들이다. 그 어수선한 예루살렘, 잘난 인물들로 가득찬 거룩한 성전 주변에 100년 인생을 다 바쳐서 메시아의 날을 기다리는 두 남녀 늙은이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 하는 찬가를 부르는 예루살렘의 늙은이. 그리고 그의 가까운 곳에 있어 함께 기도하면서 주 우리의 메시아 날을 기다렸던 여선지자인 안나.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과부된 지 84년. 결혼 생활은 겨우 7년, 역시 이 여인도 100살이 넘었다.

인생 백년쯤은 기도해야 은총의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을까? 아브라함도 75살에 바벨론 땅 하란에서 세겜으로 와서 헤브론에서 죽을 때 175살이었으니 그 역시 1백여 년을 메시아 만남을 위한 시간들이었을까?

죽음의 시간이 멀지 않아 보인다. 길어야 1,20여 년. 짧으면 더 가까이 내게 손짓하는 그 시간 은총의 해방 날, 나는 그날이 오기까지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초심을 붙잡고 메시아의 날을 기다린다.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아직 미숙하고 서투르다. 앞서 말한 시므온이나 안나의 선지인생은 물론 모든 셈족인들, 그리스도인 유대인, 아라비아인들까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함께 떠올리면서 한 번 허락하신 내 인생을 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품으로 드리고 싶다.

창세기 22장, 모리아에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신다. 무서운 하나님의 통찰력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기 이전부터 아브라함은 이미 선택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 12:1~) 히브리(떠돌이)되어 1백여 년 동안 하나님을 배우고 메시아를 찾아서 사막과 황야의 긴 생활을 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평가는 냉혹하고 진실했다.

아브라함에게 진실하셨던 하나님은 ‘들소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때로는 칼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한 점 허물도 용납하지 않으실듯 하셨으나 또 자애로운 어머니 손길로 나의 못난 허물과 약점을 감싸주시기도 하신 하나님이 나와 들소리의 승부수를 붙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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