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흔적을 찾아서(3)
15세기부터 세인트앤드류스의 중심부인 현 장소에 있었고, 시민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감당해 와

홀리 트리니티 교회
홀리 트리니티 교회

영국의 다른 대학들처럼,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역시 대학 건물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세인트앤드류스는 도시가 대학이고 대학이 도시인 그런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라도 도시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도보로 시내를 돌아본다 해도 크게 힘들지 않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역사적인 분위기와 깔끔하게 단장한 대학 건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의 활동무대였다. 존 녹스 이전의 종교개혁자 패트릭 해밀턴은 인문학부(Dept. of Arts) 교수 및 살바토르 채플(St. Salvator's Chapel)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고, 존 녹스의 스승으로 당대의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존 메이어(John Mair)는 세인트 메리 칼리지(St. Mary College)의 학장으로 재직했다. 존 녹스는 이 대학의 신학부 학생이었으며, 녹스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드높였던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역시 이 대학의 교수 및 목사로 활동한 바 있다. 이처럼 세인트앤드류스 대학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는 15세기부터 세인트앤드류스의 중심부인 현 장소에 있었고, 시민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감당해 온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에서는 지금도 매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데, 현지인과 학생뿐 아니라 방문객까지 참여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예배를 경험할 수 있다. 원래 이 교회는 1243년 대성당의 내부에서 봉헌되었는데, 1412년 현 장소로 이전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현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후 홀리 트리니티는 1909년 에버도어(Aberdour)에서 가져온 컬라로(Cullaloe) 사암을 주로 사용하여 재건축되었고, 당시 피터 맥그레거 챨머스(Peter Macgregor Chalmers)라는 건축가가 중세교회 형태의 디자인으로 되돌려놓았다. 아마도 원래 교회 형태의 복원을 통해서 교회의 과거 영광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대학 중심부에 위치한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도착했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설교단과 스테인드글라스라 할 수 있다.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포함하여 설교단 전체는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설교단 대리석의 빈틈 사이로 강렬한 조명이 뿜어나오고 있었는데, 이는 설교자의 권위를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하는 듯 보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서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성화는 정교하고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과연 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참여했을까? 예배당 건물에 신앙적 의미를 강하게 투영했던 중세 당시에,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헌신을 그들이 참여한 이 일에 온전히 쏟아 부었을 것이다. 마치 설교자가 자신의 열정을 모두 쏟아 부어 설교 준비를 하듯 말이다. 사실 중세 스코틀랜드에서는 일반 성도가 직접 성경을 대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당시에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림으로 표현된 성경이라고 할 만큼 스테인드글라스의 역할은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중세 당시 순례자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성경 이야기의 장면 하나하나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하는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회중석 뒤쪽에서 특이한 게시판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전 홀리 트리니티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 명단을 A4 용지 한 페이지에 쭉 열거해 놓은 목록이 게시되어 있었다. 1412년 이 교회를 담임했던 성직자 윌러엄 보나(William Bonar)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 이전의 성직자들은 세로로 한 줄로, 종교개혁 이후의 성직자들은 두 줄로(the First Charge와 the Second Charge) 빼곡히 적어놓았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역사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 목록을 적어놓은 A4 용지도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존 녹스가 최초로 공적 설교를 전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페스트가 유럽을 뒤덮을 당시,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목회자인 존 러더포드마저도 이 역병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 목회자에 대한 존경의 정도를 고려하면, 페스트에 대한 회중의 공포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페스트에 의해 희생된 존 러더포드 목사를 바라보면서, 회중들은 목회자 역시도 일반 성도와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순례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홀리 트리니트 교회는 목회자가 페스트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소위 ‘은혜가 안되는 사건’(?)으로 여겨 숨기려 하지 않고, 교회의 중요한 사건 목록에 포함시킴으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어지는 목회자의 면직과 관련된 내용은 우리의 흥미를 자아낸다. 술 취한 사실로 인해 면직된 글래드스탄스(Gledstanes) 목사와는 달리, 리차드 워델(Richard Waddell)과 존 우드(John Wood) 목사는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비록 왕의 성명서라 하더라도 회중 앞에서 낭독하지 않았던 신앙적 지조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되는 가운데 생을 마감한 존 박(John Park) 목사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하던 순간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복된 순간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1874년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회중이 목회자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은 지역교회 회중의 권한이 확대된 사실을 보여준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1929년 홀리 트리니티 교회 내에 여성 길드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교회 여성들의 역할이 교회 내외에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여성 길드가 형성되었던 때는 국내 예장 통합 교단 산하 <대한예수교장로회여전도회연합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인전도회>가 창립된 시기와 비슷하다. 

그동안 한국교회 각 교단 산하 여전도회연합회가 교회와 사회를 위한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수행해 왔고, 이는 한국교회의 급성장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 리더십은 여전히 남성 위주로 되어있다. 최근 들어 여성 리더십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사회에서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증가하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교회 내의 여성 리더십 확대는 여성들에 대한 교육훈련의 확대가 그 토대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A4 용지 두 페이지에 적힌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역사적 목록을 하나씩 묵상하다 보니, 마치 추억의 영화를 다시 관람하듯, 역사적 사건들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이 내용은 김승호, <존 녹스 로드: 영국 종교개혁지 순례>(하명출판사)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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