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광섭 목사창현교회 원로
허광섭 목사
​​​​​​​창현교회 원로

교계신문을 읽다가 번뜩 빈대와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떠올랐다. 1960년 중반 신학교 기숙사에 빈대가 어찌나 많았던지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빈대 때문에 겪는 고통과 빈대를 없이한 후의 시원함을 나는 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옛말이 있다.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다 크고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무시해서 모든 것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나? 한국기독교가 과연 복음적 기독교를 지향하고는 있는가? 묻게 된다.

감리교단이 최근 결정하는 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지난 10월 20일 총회 재판위원회에서 제2회 인천 퀴어 문화축제에서 성 소수자 축복식 집례(2019. 8. 31)를 한 이 모 목사의 2년 정직 결정이다. 이유는 성 소수자 앞에서 성의를 입고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를 옹호하고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직 안건처리 법적 근거는 그 교단 일반재판법 3조 8항이다. “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정직 면직 출교에 처할 수 있다”이다. 

둘째는 10월 27~28일 개최한 제35회 행정총회에서 ‘한국기독교협의회(KNCC)는 동성애를 옹호, 차별금지법을 지지는 반성경적, 친북적, 공산주의, 종교 다원주의, 천주교와 일치 운동으로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며 ‘WCC(세계기독교 협의회)에 회원으로 가입된 KNCC-한국기독교 협의회에서 교단은 탈퇴해야 한다’는 안건이다. 설왕설래하다가 부결됐지만 상당한 논쟁이 일었단다.

감리교단의 이런 기사를 읽으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말씀이 생각났다. 죽음을 향한 예수님이 길에 당대의 종교와 정치와 시대 신앙과 정신을 대표하는 예루살렘 유대교가 유능한 율법학자를 선별하여 무리 중에 숨어 예수님을 감시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감시를 넘어 율법학자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자신의 신학과 신분을 노출하고 만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질문에 질문하셨다. 율법인 토라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너는 그 말씀을 어떻게 읽었느냐? 신앙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했다. 예수님의 의도적인 질문이다. 율법학자답게 바른 대답을 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예수님은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구원이라 하지 않고) 하셨다. 감시자 율법학자에게 구원받을 사람으로 확신하는 신앙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를 아는 것에서 행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비로소 구원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저자인 ‘누가’는 율법학자를 분석한다.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서 다음 질문은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율법적 갈등으로 예수님의 허물을 잡으려는 그의 의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다. 유대인은 유대인만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선택받은 선민이며, 하나님은 자신들만의 신이시고, 자신들만을 위한 신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자신들만이 것이라고 가르쳤고 다른 족속은 저주와 정복돼야 마땅하다고 조상과 유대교와 역사로 배워왔다. 예수님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은 비유로 듣는 각 사람이 듣고 답을 찾도록 하셨다. 

그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강도 만난 한 사람에게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려진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는데 여행 중인 사마리아 사람이 응급조치하고 자기 짐승(차)에 태워 주막(병원)에 데려가 입원시키고 하루를 간호하고 비용을 담당하고 더 드는 비용은 돌아올 때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단다. 

비유의 중심은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가’이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의 국적, 피부색, 지위, 종교 등을 상관하지 않고 도리어 역사와 신앙과 정치적 관계에서 유대인으로부터 무서운 차별을 겪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의 중심인물로 삼으셨다. 이웃이 되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음과 피 흘림에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레19:18, 신 6:5)는 규례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 살림은 못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을 율법학자의 입으로 밝히게 하신 것이 예수님의 또 다른 의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모든 벽을 헐어 보편적이고 우주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셨다. 이를 ‘누가’는 그의 복음적 신학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그때와 그곳과 그 사람과 생명에게 이웃이 되라고 권유하고 있다. 

오늘 우리를 본다. 결코 온전하지 못한 나(기독교)를 지키려고 예수님의 기독교와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거룩하다고 확신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복음전파에 헌신하는 이웃을 정죄하고 있는 모순된 동반자는 아닐까? 성전을 보시고 한탄하신 예수님의 한탄과 눈물을 한국교회는 보고 있는 것인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