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도움 속에서 양육이 두려워 입양을 원했던 산모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키울 힘도 얻었다. 이 과정이 ‘청개구리밥차’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곳이 아무런 선행 조건도 필요 없는 ‘개방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
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

인간은 소유와 소비에 집착한다. 왜 그럴까? 놀랍게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든, 타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하지 않는다면 소유도 소비하려는 의지도 없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물질적 풍요는 사랑할 대상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사랑의 과잉 시대다. 하지만 차고 넘치는 사랑이 이기적 목적에 집중된다면, 이는 타인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동반하면서 결국은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기에, 공동체를 향한 이타적 사랑이 필요하다.

한국은 혈연, 지연, 학연, 나아가 국가주의가 유별난 사회다. 한마디로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한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람은 이타적으로 보인다. 반면,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가족 이기주의를 벗어나 더 큰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공동체 역시 이기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지역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가족을 넘어 상위 공동체를 중시한다고 해서 이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보인다. 가족은 이웃과 비교할 때 이기적 단위이며, 지역은 국가에, 국가는 인류에 비해 이기적 단위처럼 보인다. 반대로 이웃은 가족에, 국가는 이웃에, 인류는 국가에 비해 이타적 단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타적이라는 것은 상위 공동체에 충실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족만 알던 사람이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에 들어갔다고 이타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공동체가 또 다른 이웃과는 등을 돌린 채, 자신들만의 이기적 이익에 매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타적 사랑이 가능하려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에도 이타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극단주의 종파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국가들을 보면 공동체가 왜 개방적이어야 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공동체적이라고 말하겠지만, 이들 국가가 드러내는 폭력과 시민의 반인권적 현실은 개방되지 않은 이기적 공동체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끝없이 확대되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나와 당신은 지역, 국가, 인류, 지구, 태양계, 우주라는 연결된 공동체 가운데 어느 단위부터인가는 함께 속해 있다. 이 속에서 내가, 혹은 당신이 속한 작은 공동체의 이익만을 극대화 한다면, 나와 당신이 함께 속한 더 포괄적인 공동체는 상처를 입는 것이다. 반면, 나 혹은 당신이 속한 작은 공동체가 개방될 때, 나와 당신이 포함된 상위 공동체는 동시에 사랑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다.

뒤돌아보면, 모두는 아니지만 기독교는 닫힌 공동체를 지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자기중심적인 ‘정복’과 ‘다스림’은 타인과 자연의 파괴를 정당화시켰다. 이기적 신앙은 창조의 하나님을 끝없이 이기적 공동체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킨다. 인간 중심에서 유대교 중심으로, 유대교 중심에서 기독교 중심으로, 기독교 중심에서 개신교 중심으로, 개신교 중심에서 개교회 중심으로, 개교회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말이다. 결국 하나님은 개인의 하나님이며,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소비되는 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최고 계명인 기독교의 진정성은 나와 가족으로부터 이웃, 국가, 인류, 지구, 우주를 넘어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이타적 개방성을 요구한다.

오늘날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 공동체의 이기성이 아닌, 인간 공동체의 이타성을 말하는 것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8) ‘정복’과 ‘다스림’은 과거의 해석과는 달리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을 포함한 지구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 책임은 인간의 능력이 증가할수록 육지, 바다, 지구 대기, 나아가 우주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것이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독교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신앙고백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어떻게 이웃과 세상을 향해 자신의 공동체를 개방하고 이타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출산이 임박한 10대 산모가 파출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파출소장이 관공서와 청소년쉼터 등에 연락하자 기관들은 모두 ‘미혼모 센터’가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내했다. 그런데 신원조회를 해보니, 혼자 가출한 상태의 10대 산모였지만, 가장 중요한(?) 미혼모는 아니었다. 소식도 끊긴 남자친구와 혼인신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개입할 수 있는 시의 위탁시설인 ‘센터’는 산모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자 파출소장은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청개구리밥차’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틀 뒤 산모는 종합병원에서 출산했고, 공간을 제공받아 산후조리를 할 수 있었다. 조건 없는 도움 속에서 양육이 두려워 입양을 원했던 산모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키울 힘도 얻었다. 이 과정이 ‘청개구리밥차’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곳이 아무런 선행 조건도 필요 없는 ‘개방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청개구리 식당’. 2022년 새해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 들소리신문
‘청개구리 식당’. 2022년 새해 청소년들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 들소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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