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향한 여정(3)

영적 리더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기꺼이 고백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서번트 리더십 훈련과 소명에 대한 응답을 통해 리더가 된 사람들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다. 목회자는 예배 공동체를 인도할 뿐, 다른 공동체를 지도하지 않는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인간개발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빌과 함께 워싱턴 D.C.로 간 나우웬은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을 주제로 세 차례 강연을 갖는다. 두 번째 강의 주제는 ‘대중성에서 목양으로’(From Popularity to Ministry)이다. 먼저 이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 후, 선한목자공동체의 중심이 어떻게 목회자에서 여러 사역자들로 이동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나우웬의 ‘대중성에서 목양으로’

6년 간 신학교육을 마친 성직자는, 목회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라고 믿으며, 모든 것이 가득 찬 가방을 메고 머나먼 여정의 길을 나선다. 나우웬의 경우, 그런 개인주의는 라르쉬에서 철저하게(radically) 변화된다. 그는 상처가 깊은 사람들과 한 공동체에 살면서 깨닫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생애를 줄타기 곡예사처럼 살아왔다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유혹은 뭔가 굉장한,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안겨다 줄 그런 일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성직자들은 그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잘해 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경쟁 사회에 팽배한 스타 의식과 개인주의적 영웅주의가 교회에도 가득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실패한 줄타기 곡예사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 예수님은 그에게 목회의 사명을 주신다. 하지만 목양이란 순한 양 떼를 돌보는 용감하고 외로운 한 목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목회란 공동체적이며 상호보완적인 경험이다. 이 세상은 효율성과 통제를 강조하기 때문에 상호관계성이란 말은 나약함을 나타내거나 역할 혼동의 위험한 한 형태로 보이지만, 아직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있게 맺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겠는가?(lay down, 요한10:14-15 참조) 진정한 목회는 반드시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 로버트 그린리프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리더십이 바로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다.

영적 리더는 깊은 관상기도에 몰두한 신비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기꺼이 고백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고백과 용서는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확고한 형태다. 성직자들이 자신이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와 실패들을 숨긴다면, 어떻게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것은 형식적인 영성화(spiritualization)와 세상 정욕을 피하고, 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훈련이다. ‘AA’와 같은 치료 공동체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훈련이 얼마나 큰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지 드러내 준다.

두 가지를 설명해야겠다. ‘서번트 리더십’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익숙한데, 로버트 그린리프가 헤르만 헤세의 중편 소설 ‘동방순례’에서 창안한 개념이다. 순례 중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하인 레오가 갑자기 사라지자 순례단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나중에 레오가 사실은 순례단을 모집했던 조직의 우두머리였음이 드러난다. 그린리프는 이 소설에서 ‘진정한 리더는 처음에는 서번트처럼 보인다’는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낸다.

한편 ‘AA’는 Alcoholics Anonymous의 약자로 직역하면 ‘익명의 알콜중독자들’이란 뜻인데, 회개와 용서를 기초로 한 이 단체의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은 알콜중독 치유에 가장 효과적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본 딴 다양한 중독자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교회나 지역 커뮤니티의 작은 강당에서 탁자 없이 중독자들이 의자에 빙 둘러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보았으리라. 한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모임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드러냄에서 내려놓음으로

2000년대 초, 워싱턴 D.C.에 있는 세이비어교회를 방문했을 때다. 처음 만난 스텝 중에 한 분이 필자에게 물었다. ‘당신을 무엇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냐?’는 것이다. 필자는 무심결에 Paster Kim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공동체가 목사라는 호칭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는 혼자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80이 넘은 고든 목사에게도 그들은 Mr. Gorde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필자가 이 경험을 꺼낸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동역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나이든 교회 규모든, 동역하자고 말하는 순간 암묵적으로 서열이 정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역관계는 열매 없이 깨어지고 만다. 안타깝게도 필자 역시 동역의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는 없다. 그런데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외로움을 넘어, 자신만을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만다. 선한목자공동체가 곧바로 김명현 목사와 연결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가리는 것이다.

세이비어교회의 리더들 가운데는 타교단의 목회자들도 있다. 그들은 서번트 리더십 훈련을 통해 수평적 구조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필자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목회로 보인다. 공동체를 세우려는 목회자는 당연히 평신도들과도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이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더 현실적이다. ‘목사들과는 동역할 수 없지만, 평신도들과는 가능하다.’ 필자가 경험에 비추어 항상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때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 동의할 때다(마18:19-20 참조). 서로 동의한다는 것은 상관과 부하의 관계에서 지시와 실행의 형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가 서로 하나님 앞에서 동의하는 관계라는 것은 그들이 가진 책임과 의무가 동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선한목자공동체는 이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서번트 리더십 훈련과 소명에 대한 응답을 통해 리더가 된 사람들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다. 목회자는 예배 공동체를 인도할 뿐, 다른 공동체를 지도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목회자는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직책과 그에 따른 존대로 이루어진 한국사회에서 권위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목회자들은 어디를 가든 성직자로 존중받기를 원하며, 상대방도 가식적일지언정 그렇게 존중해 준다. 공동체를 세운다고 하면서도 목회자는 자신이 공동체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진정한 애정과 친밀함이 없으며 따라서 목회자에겐 불안과 의심이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평신도를 독립적인 공동체의 중심으로, 진정한 리더로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진정한 공동체란 하나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야 한다. 앞서 소개한 세이비어교회 역시 하나의 거대한 성을 쌓았기 때문에 공동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가 ‘세이비어 교회란 없다’고 말하면서 현장에서 사역하는 공동체를 향해 ‘진정한 교회’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각각의 공동체에서 목회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필자는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두루두루’에서는 ‘바리스타’로, 어린이식당인 ‘마루’에서는 ‘주방장’으로 그리고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청개구리’에서는 돈가스를 만드는 ‘자원활동가’일 뿐이다.

목회자가 흩어진 공동체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구체적인 형태로 그 공동체의 리더 아래 있어야 한다. 필자는 목회자가 선교 현장이나 독립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 방문할 경우,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은 설거지라고 생각한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