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향한 여정 (4)

예수님에게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ability)이자 의지(willingness)다

서번트가 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웨이터(waiter)가 된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웨이터는 손님이 주문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다.

섬기는 교회와 크리스천이 되려면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참된 신학은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리드를 당하는 법’을 알려준다.


‘인간개발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빌과 함께 워싱턴 D.C.로 간 나우웬은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을 주제로 세 차례 강연을 갖는다. 마지막 강의 주제는 ‘이끄는 자에서 이끌리는 자로’(From Leading to Being Led)이다. 먼저 이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한 후, 선한목자공동체가 사랑하기 위해 힘을 포기하고 이끌려가는 신학적 이유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나우웬의 ‘이끄는 자에서 이끌리는 자로’

 헨리 나우웬
 헨리 나우웬

나우웬은 탁월한 리더십과 삶을 조절하는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르쉬의 장애인들은 그의 논리적 생각에 논리적으로 반응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적 우월감 대신, 기쁨과 평화, 사랑과 관심과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었으며,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었던 슬픔과 폭력과 두려움과 무관심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라르쉬에서 나우웬은 리더십이 리드를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세 번째 시험이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방 국가들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났을까? 바로 ‘힘’ 때문이다. ‘힘을 갖는 것’이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기는 데 쓰인다면 좋은 것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아마도 힘이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라.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네 옷을 차려 입고 네가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다녔으나, 네가 늙으면 너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네 옷을 입혀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요21:18)

예수님에게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ability)이자 의지(willingness)다. 자신이 모르는, 또 바라지도 않는 고통스러운 곳으로 이끌려 가는 지도자가 ‘섬기는 지도자’다. 영적 리더십의 길은 세상이 강조하는 ‘상향적인’ 길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끝나는 ‘하향적인’ 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리더십은 힘과 지배의 리더십이 아니라 무력(powerlessness)과 겸손의 리더십이며, 오직 사랑 때문에 계속해서 힘의 사용을 포기하는 리더십이다.

따라서 미래의 리더는 급진적으로 가난한 리더여야 한다. 가난은 우리가 인도받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가 참된 지도력을 발휘하게 해 준다. 만일 미래 교회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리더들이 기꺼이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가난한 교회에 거는 희망일 것이다. 이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디로 인도받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신학적 성찰’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심리학이나 사회학과 같은 행동 과학이 지배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제기하는 질문은 성경적 용어로 포장된 심리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질문들이 대부분이다. 철저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면 미래의 크리스천 리더들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회사업가의 아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세상을 향해 반드시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이 인류 역사의 가장 작은 일까지도 카이로스(Kairos)로,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인도해 주는 기회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한 목소리로 선포해야 한다.

 

교회를 세움에서 하나님께 이끌리는 공동체로

선한목자공동체는 사역의 현장에서 돈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돈을 유혹으로 여겼는데, 문제는 유혹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공동체 초기에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왔다. 그들과 가족과 같은 환경을 만들려면 더불어 살 수 있는 집이 필요했다. 한 가구부터 시작해서 여섯 가구를 얻었는데 시에 자금을 요청하지 않았다. 요청한다 해도 지원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인테리어 공사는, 천정과 화장실 개조부터 벽지와 바닥까지 우리가 직접 했다.

당시 비인가 시설을 운영한다며 비난하던 공무원들도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곤 사회복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가정환경을 만들었음을 인정하고는 감히 더 이상 복지시설로 등록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아이들은 독립된 방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독립된 가구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는 당시도 지금도 어떤 법도 위반하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 넘쳐나는 대형교회들도 이런 환경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돈으로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실제로는 허무맹랑한 말일 뿐이다.

사랑을 실천하려면 서번트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서번트가 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웨이터(waiter)가 된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웨이터는 손님이 주문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손님의 주문이 있은 후에는 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행동하는 사람이다. 서번트 리더가 된다는 것은 웨이터처럼 ‘당신이 먼저 말하고, 나는 뒤에 행동한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일수록 말을 듣기 전에 말하고 싶어 하고, 기다리지 않고 먼저 주장하길 좋아한다. ‘나는 말하고 당신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교회와 사역자들에게 팽배해 있다. 사랑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채, 순종과 사랑받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은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란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교회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런 감추어진 교회가 진정한 교회(authentic church)일 것이다.

이렇게 섬기는 교회와 크리스천이 되려면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참된 신학은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리드를 당하는 법’을 알려준다. 사회과학은 인간을 치유나 조종의 대상으로 여긴다. 성과를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그래서 돈으로 가치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이런 현실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알면서도 한국교회 크리스천들이 ‘지금은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소개한 두 번째 글에서 간단하게 언급했던 음성듣기, 제비뽑기, 양심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이 세 가지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께 이끌리는 방법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을 통해 듣는다.(사무엘상 16장 참조)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이 구체적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이 사역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요청하신 일이 될 수 없다. 이미 말했듯이 이 부르심을 확인하는 데는 3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블레셋에게 약탈을 당하던 유다 성읍인 그일라의 주민들이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숨어 지내던 처지였다. 다윗을 따르는 부하들은 모두 반대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다. “내가 출전하여 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도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허락하시는데, 다윗이 묻고 답을 들은 방법은 ‘우림과 둠밈’ 즉 제비뽑기였다(사무엘상 23장 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길을 갈 때에도 여러 가지 선택의 상황들에 놓이는데, 이 때 마다 그 결정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제비뽑기의 의미다.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숨어있던 다윗은 용변을 보러 혼자 들어온 사울을 죽일 수 있었다. 다윗의 부하들도 말했듯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윗은 몰래 사울의 겉옷자락을 자른다. 성경은 그것만으로도 다윗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윗은 ‘기름 부어 세움 받은 왕을 칠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사울을 살려준다(사무엘상 24장 참조).

소명에 따라 나선 공동체의 길은 우선적으로 양심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요청 앞에서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고 외면하거나, 제비뽑기로 도울지 말지를 결정하지도 않는다.

이 세 가지는 선한목자공동체가 현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이끌림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의지가 아닌 하나님을 따르려 한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웃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며, 그들의 요청에 이끌려 가도록 한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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