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와 법치주의

예수는 힘을 사용한 적이 없다. 법치주의자들이 법치주의를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공동체 안에는 사랑과 평화가 성장하면서 오히려 법의 존재 이유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법치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수 답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하 교회협) 정의·평화위원회는 노조법 2,3조의 개정을 기원하며 지난 2월 13일 오후 3시 여는 기도회를 시작으로 매일 저녁 7시 국회 앞에서 금식기도회를 진행했다. 이 사진은 이 칼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하 교회협) 정의·평화위원회는 노조법 2,3조의 개정을 기원하며 지난 2월 13일 오후 3시 여는 기도회를 시작으로 매일 저녁 7시 국회 앞에서 금식기도회를 진행했다. 이 사진은 이 칼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사실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기 전엔 법치를 철석같이 약속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는 법치주의를 강조한다. 현 정부는 ‘자유’와 ‘법치’를 무척이나 강조한다. 그런데 자유를 한도 끝도 없이 강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법치를 ‘법률에 의해서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기에, 법치라는 말을 쓰면서 은근히 법치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나는 테러리스트다’ ‘나는 여성혐오주의자다’라는 말처럼 결코 써서도, 이념체계로 가져서도 안 되는 말이 ‘법치주의자’라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인들이나 법조인들은 법치주의와 법치주의자라는 말이 자신이 원칙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혐오스러운 율법주의자들이여!

오늘날 스스로를 법치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은 위선자구나’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법치주의자란 권위주의자라는 뜻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쓰는 이 말을 입헌주의자라는 의미로 쓰고 싶어 할 것이며, 그렇게 알아달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한 것을 굳이 합리화시킬 필요는 없다. 이 합리화가 흔히 말하는 무슨 ‘주의’니 ‘주의자’니 하는 것이다. 입헌주의에 근거한 법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므로 법치주의자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법치주의자, 즉 율법주의자라며 자랑스레 떠벌리는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바닥이며 자살률은 최고수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행복에 필수적인 사랑과 믿음을 나눌 공동체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법치주의자들을 심하게 비난한 것은 그들의 법치주의가 득세할수록 사회를 지탱하는 공동체는 파괴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모습들을 보자. 조그만 다툼거리가 생겨도 공동체가 가진 화해와 용서 대신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증오와 처벌을 앞세운다. 이런 사회는 갈수록 메말라 가며, 행복할 수 없다.

예수는 당시의 법치주의자들을 혐오하며, 위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사회의 지도자들이 법치주의를 자랑스럽게 주장할 때, 종교지도자들이라도 이웃사랑을 수줍게라도 외치면서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정치지도자들과는 달리 종교지도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법치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성서시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수준까지 가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예수가 모범을 보이신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요즘 행태들을 보면 한편으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려다 늪에 빠진 경우이지 않겠는가? 그에 비해 오늘날 종교지도자들 가운데는 아예 법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말이 곧 법이며 하나님의 법이든 사회법이든 언제든 무시할 수 있다. 사이비 교주는 물론이고, 교회세습과 교회 내 분쟁 가운데 있는 목사들은 교회법도, 나아가 사회법도 필요 없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교회법이나 사회법이 이미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세습을 바꾼 경우를 보지 못했다. 법은 불의한 교회 담임자를 바꾸지도 교단 탈퇴를 막지도 못한다. 재개발과 관련된 한 교회의 사건에서 보듯이 종교지도자들이 힘을 포기한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폭력의 무한한 능력을 깨우친 탓이다.

예수는 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우리가 말하는 법치주의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비판했을까? 그것은 사랑과 평화가 중심이 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법이 권력자의 권력 유지의 수단이 되어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힘을 가지고 법 위에 군림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힘을 사용한 적이 없다. 법치주의자들이 법치주의를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공동체 안에는 사랑과 평화가 성장하면서 오히려 법의 존재 이유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법치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수 답(필자는 거의 모든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을 공동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 참고
 

율법과 율법주의


‘율법’이란 한국교회가 성경에 등장하는 ‘법’ 또는 ‘하나님의 법’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쓰게 된 단어다. 일반적으로는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신정사회의 법을 지칭한다. 그러나 영어에 법과 율법을 구분하는 단어는 없다. 사실 율법이란 단어도 법률을 뒤집은 것으로 단어 자체로는 종교적 색채가 없다. 율법이란 곧 법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법률주의라는 말 대신 법치주의라는 말을 쓴다. 결국 율법주의와 법치주의는 같은 말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이 사회 전반을 지배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율법의 문장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해석하면서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주의와 그것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매우 부정적이다. 종교적 극단주의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법이 집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이미지는 시민의 자유를 억누르며 약자의 권리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율법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없다. 사실 성서시대에 율법주의니 율법주의자니 하는 단어는 없었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대놓고 비난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들은 백성들에게는 한도 끝도 없이 법을 강요하지만 자신들은 법을 지키기 위해 손 하나 더럽히지 않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위선자들이라고 부른 자들을 우리가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법치와 법치주의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국회에서 만든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나라나 권력자가 국민의 자유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지울 수 없다는 근대 입헌 국가의 정치 원리.” 법치주의의 사전적 의미다.

여기서 ‘법치’란 법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권한을 가진 자는 법에 의해서만 그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렇게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정해진 법에 따라서만 그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는 취임선서에서 잘 드러난다. 선출되거나 임명된 이들의 취임선서는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합법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법치의 다짐이다.

하지만 시민을 향해 권력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법치주의’는 법치와는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데, ‘법으로 국민의 자유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지울 수 있음’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법치주의는 율법주의와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그 의미도 율법주의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정확하게 같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법치주의를 주장하거나 법치주의자임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준비된 연설문을 가지고 연설할 경우, 법치주의나 법치주의자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필자가 아는 한, 없다. 다만 준비된 원고가 없을 경우, 특히 선거 기간 중에는 법치주의를 강조하거나 자신이 법치주의자라는 말을 내뱉곤 한다. 합법이란 이름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픈 속내를 들킨 경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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