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증거하는 예수(7)-요한복음 7장

이제는 앉은 자리의 큰 목소리가 아니라 벌떡 일어난 것이다. 
당시 아람 풍습으로는 랍비가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휘젓지 않는다. 
예수의 몸부림이고 절규다. 

내가 아우성을 친 것이 아니야. 유월절 축제의 자리에 오니까 대화의 상대가 많아요. 묻기도 하고, 자기 경험과 지식을 말하는 율법의 고뇌도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간절한 심정이 되더라구요.

어설픈 광야의 떠돌이들, 지금은 광야를 떠돌기할 때가 아니라 약속의 주인공을 만나야 하는 시즌이야. 디베랴 호수 건너편 유대 광야의 시간은 지나도 나는 지금 유월절 현장인 예루살렘에 있어요.

명절 중인데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그를 만나서 궁금한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이들이 있고, 또 율법 해석상의 문제로 시비하려는 이들도 많구나. 그런데 정작 진지한 자세로 예수를 배우고 싶은 이들이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네.

요한복음 7장 14절은,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니”의 기록처럼 유대인들의 관심이 매우 집중적이었다. 이 사람이 “배움이 없는” 자인데로 표기한 부분은 문맹이 아니라 깊은 공부를 하지 못한 수준이라는 뜻일게다. 가말리엘의 할아버지인 힐렐이나 샴마이 같은 랍비, 그 이상의 수준을 말한다고나 할까.

이름 없는 갈릴리, 비린내 나는 어부들 틈바구니에서 선생 노릇을 했다는 예수가 예루살렘 유월절 현장에 나타났다. 율법해석이나 메시아 강림에 대한 시사적인 부분 등도 알고 싶고 이들이 예수와 마주치니까 글쎄, 선생 같기도 하고 촌 서생쯤 되는 어설픈 자칭 선지자급으로 보는 듯하다.

예수는 모세 이야기로 깊숙이 빠져든다, 예수의 모세와 율법해석에 군중은 둘로 크게 나뉜다. 귀신들린, 인간, 또는 근래에 만나보지 못한 비범한 선지자로 눈독을 들이는 이들까지 자못 분위기가 험상궂게 된다. 예수를 잡으려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지시를 받은 체포조가 꽤나 많아 보이는 살벌함까지 숨이 막혀 온다.

그때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요 7:28)로 목소리를 높인다.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라는 말씀을 곱씹어 보라. 하나님의 보내심이라 하시지 않는가. 혼자서 결심했거나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하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감정 동요도 살펴야 한다. “외쳐 가라사대”는 당시 유대인이나 아람 관습으로는 있기가 쉽지 않은 돌발 상황이다. 주변 환경을 갈무리하려는 결단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표현으로는 신사도를 벗어났다고 할까.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 행길에서 비가 쏟아져도 뛰고 달리지 않는다와 같은 분위기다. 외쳐 가라사대, 이어서 37절에는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가 나타난다. 외쳐 가라사대가 모자라서 “서서”가 나타났다. 이제는 앉은 자리의 큰 목소리가 아니라 벌떡 일어난 것이다. 당시 아람 풍습으로는 랍비가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휘젓지 않는다.

예수의 몸부림이고 절규다. 우리는 가야바와 예수 잡으러 갔던 자들, 가야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선생 니고데모의 대화를 다시 눈여겨 보자. 예수를 믿지 않는 대제사장, 절반씩 믿고 배반하는 예루살렘 유월절 사람들,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를 지켜보는 니고데모. 늙어서 힘이 없는가? 가야바와 뜻이 통하지 않아서인가? 니고데모의 말 끝에 흐르는 여운은 이스라엘 흥망,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흥망과도 상관이 깊은 한마디가 아직도 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조효근/목사,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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