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동체와 부
-누가복음을 통해 본 공동체의 시작(2) -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누가복음 6:27-36)

예수는 가난한 제자들과 부자 제자들 모두를 ‘하늘나라’ 공동체로 불렀다. 예수는 가난한 제자들을 향해 하늘의 상을 내리면서도, 부자 제자들에게는 지옥의 벌을 내리지 않는다. 부자 제자들은 가난하게 됨으로써 축복을 함께 누리도록 초대 받는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가난한 제자들은 그 가난함(being)으로 ‘하늘나라’ 공동체를 이루는 반면, 부자 제자들은 가난해짐(doing)으로 그 공동체에 참여한다.”

예수는 가난과 부를 어떤 기준을 가지고 나누지 않는다. 그랬다면 부자 제자들은 공동체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있음’과 ‘행함’의 측면에서 언제나 가난해야 한다. 제자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부를 나누려고 해야 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타인을 향해 부가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떼제 공동체 수사들의 예배 모습
떼제 공동체 수사들의 예배 모습

공동체는 원수를 사랑한다

가난한 제자들에게 복을 선포한 예수가 부자 제자들에게는 화를 선포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원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부자 제자들에게 지옥의 저주를 내리지는 않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한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과 부는 더 이상 편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상태(being)와 행위(doing)의 문제가 된다. 서로는 원수가 되는 대신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는 모든 제자들이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가난한 ‘상태’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원수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가난한 제자란 ‘하늘나라’라는 공동체에 속함을 드러내는 상태, 즉 ‘존재’의 규정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예수가 요청하는 모든 행동은 사실 부자 제자들을 향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부자 제자들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행동을 요구받는 모든 제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기준 이상의 재산을 지닌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모든 제자들인 것이다.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어라.’ 공동체로 초대받은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지금’ 당신이 선택한 선한 행동은 ‘곧이어’ 상대로 하여금 미움이라는 저주받을 부의 특성을 버릴 수 있도록 할 가능성을 연다. 공동체는 이렇게 선순환하면서 가난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청하는 또 다른 행동들은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스스로 기를 쓰며 부자가 되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러분이 그들을 축복하고 기도하면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여러분을 가난한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움과 저주와 모욕은 여러분을 강제로 가난하게 만들겠지만, 여러분이 오히려 그들을 잘 대해주고 축복하고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원수를 대접한다

원수를 대하는 또 다른 경우는 직접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는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5:39)에서는 이렇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오른쪽 뺨을 때리기 위해 오른쪽 손등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를 모욕하는 행위이며, 왼쪽 뺨을 돌려 대는 것은 저항하는 행위다. 하지만 누가는 그저 한쪽 뺨이라고 말한다. 다음에 나오는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부분도 마태복음(5:40)에서는 이렇다.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은 고소하는 사람의 행위이며, 겉옷까지도 내주려는 것은 저항의 행위다. 하지만 누가는 먼저 겉옷을 빼앗는 경우를 말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약자가 비폭력을 통해 강자에 맞서고 있다. 반면, 누가복음에서 첫 번째 행위자는 폭력을 휘두르는 상대적인 부자며, 두 번째 행위자는 폭력과 강탈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려는 사람이다. 누가복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공동체는 부자임을 과시하거나 약탈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다른 쪽 뺨까지 대주는 겸손과 알몸을 각오하면서 속옷까지도 내어주는 배려를 통해서다. 이러한 행동이 여러분을 가난하게 할 것이다. 상대 또한 부자가 되려는 욕심을 내려놓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들도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 예수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욕심을 가지고 있는 한 ‘존재’(being)로서의 가난은 불가능하다. 오직 공동체 안에서는 나의 가난을 향한 행위가 너의 가난을 향한 행위, 즉 욕심을 버리도록 유도할 뿐이다. 예수는 부자 제자가 공동체로 들어서는 자발적인 행위에 대해 말한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공동체를 향한 길은 자비의 길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없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분파를 만들고 공동체를 깨뜨릴 뿐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축소, 소멸시키는 일이다. 공동체가 있는 곳에는 사랑만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랑만 있는 곳에는 극도의 이기주의만 있을 뿐이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해 주는 것’과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주는 것’도 공동체 속에 있는 악한 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가온 ‘하늘나라’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것들이다. 예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모든 것은 원수를 향한다. 우리가 공동체의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다. 원수 사랑이 없는 곳에 ‘하늘나라’는 없다.

예수는 말한다.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는 실천적 가난으로 ‘하늘나라’ 공동체에 속하게 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가난한 상태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청한 가난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인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을 닮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풍요롭지 않은 가난한 공동체는 없다

자비란 가난한 상태가 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 자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직접 인간이 되려는 것이었다. 바로 철저하게 가난한 상태가 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난해짐으로써 우리를 하늘나라에 초대했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또한 가난해짐으로써 그 하늘나라를 세상 속에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가난해짐이란 어떤 기준선 이하로 내려간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다. 가난해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손익을 따져보는 가난해짐으로는 공동체를 이해할 수도 이룰 수도 없다. 가난해짐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공동체는 존재(being)로서 가난한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를 이루려 할(doing) 때 우리는 예수를 따르게 되며, 예수와 하나가 되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자비란 가난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진정한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 가난해지려는 행위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풍요롭지 않은 가난한 공동체는 없기 때문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