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3. 공동체와 가난
- 누가복음을 통해 본 공동체의 시작 (1)-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돈을 받으면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사회복지 제도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제도가 공동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제도는 어둠을 가리고 슬픔을 숨길 수는 있지만, 어둠을 밝음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 수는 없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누가복음 6:20-26)
 

부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지 않으시다

산에 올라 밤을 새우면서 기도한 예수가,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부르고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았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무리를 이루었다. 누가는 이 가운데서 특별히 제자들을 떼어낸다. ‘예수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고 말한다.’ 온 유대 땅과 이방지역에서 예수를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다. 예수의 시선은 남겨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제자들을 향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는 먼저 가난한 제자들을 축복한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한다. 그 가난한 제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굶주리는 자들’이며, ‘지금 슬피 우는 자들’이며, ‘미움당하고, 인자 때문에 배척당하고, 욕을 먹고, 그들의 이름이 악하다고 내침 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가난한 제자들은 곧 복을 누릴 것이다. 그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며’, ‘웃게 될 것이며’, ‘기뻐하고 뛰놀게 될 것이다.’

누가는 이 미래를 ‘그날에’라고 말한다. 예수가 이 설교를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했다면, ‘그날’은 먼 미래나 사후에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약속이 될 것이다. 이 설교를 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곧바로 부자가 되어 배부르고 웃고 뛰놀 상황이 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가져온 예수와 지금부터 공동체를 이룰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라는 축복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공동체 안에서 축복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한편 예수는 부자들을 저주한 후에 가난한 자들에게 축복을 내린 것이 아니다. 사실 혁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혁명은 부자와 권력자의 질서를 먼저 무너뜨린 후 가난한 자들이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직접 ‘하늘나라’를 가지고 왔기에 이 나라를 차지할 가난한 자들을 먼저 축복한다.

그런 후에 예수는 부자 제자들을 향해 선포한다.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부자 제자들을 향한 저주의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말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이제 저주 받아라? 일단 부자 제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배부른 자들’이며, ‘지금 웃는 자들’이며, ‘모두에게 좋은 말을 듣는 자들’이다. 그들은 곧 화를 당할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반대되는 모습 때문에 저주의 말을 듣는다. 그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며’, ‘슬퍼하며 울 것이다.’

부자 제자들을 향한 저주의 내용은 정확하게 가난한 제자들이 받을 축복의 근거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되지만, 지금 배부른 사람은 굶주리게 될 것이며,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웃게 되지만, 지금 웃는 사람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축복과 저주는 정확하게 반대가 된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다르다. 예수는 가난한 제자들을 향해서는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면서도 부자 제자들에게는 ‘그날’에 해당하는 저주를 선포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부자 제자들에게 내려진 저주를 보자. 지금 배부른 사람은 굶주리게 된다고 했으며, 지금 웃는 사람은 슬퍼하며 울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자 제자는 곧 가난한 제자가 된다. 그럼 이제 부자 제자도 가난한 제자에게 주어진 축복에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예수가 제자들을 향해 말하면서, 가난한 제자와 부자 제자들을 갈라놓은 후, 부자 제자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선포를 했을까? 아니다. 예수는 부자로서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는 부자 제자들을 향한 저주를 내리지 않는다. 가난한 제자들에게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한 예수는 부자 제자들에게 ‘그 날에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라’고 하지 않는다. 부자 제자들은 가난한 제자들이 됨으로써 그들도 ‘하늘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자 제자들에게 선포한 저주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곧바로 축복이 된다.

가난한 공동체를 이룰 제자들

이로써 모든 제자들은 가난한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먼저는 가난한 제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로부터 시작된 ‘하늘나라’ 공동체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들은 예수가 말한 복이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다음은 가난과 연대하는 제자들이다. 이들은 가난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난과 어울림으로써 가난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알아차린다. 마지막으로는 자발적으로 가난해진 제자들이다. 이들은 가난한 공동체만이 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이상적인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가난한 제자들과 기꺼이 가난해지려는 부자 제자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이란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노숙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청소년이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려면 가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발적 가난이란 공동체로 들어가 함께 어울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신의 부의 부분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놀아주면서 아이들이 주는 신비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그들은 이러한 만족과 기쁨 때문에 스스로 가난해지면서 아이들과의 연대를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해진다는 것의 의미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반감과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노숙자나 가출 청소년들을 향해 드러낼 수 없는 욕을 해댄다. 하지만 일단 그들과 만나기 시작하면 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저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될 뿐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려는 ‘하늘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려면, 그래서 배부르게 되고 웃고 기뻐하며 뛰놀 수 있으려면, 지금 여기에 가난한 자들만 있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하다. 예를 들면 ‘청개구리밥차’에서 청소년들이 배부르게 웃고 뛰노는 것은 그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과 연대하고 자신의 부를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을 위한 밥집인 ‘두루두루’도 마찬가지다. 그 공간에서 식사나 음료를 준비하고 나누는 누군가의 수고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미래의 자양분이 될 웃음은 줄어들 것이다. 어린이식당 ‘마루’를 보자. 많은 어른들의 참여와 헌신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나중에 커서 돈 벌어서’ 혹은 ‘죽은 다음에나’가 될 것이다. 축복의 공동체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이처럼 작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돈을 받으면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사회복지 제도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제도가 공동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제도는 어둠을 가리고 슬픔을 숨길 수는 있지만, 어둠을 밝음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 수는 없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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