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동체와 태도
- 누가복음을 통해 본 공동체의 시작(3) -

교회 안을 보라. 아무도 심판하지 않고,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며, 용서가 가득하다. 그러나 교인들의 태도도 그러한가? 온갖 판단과 저주와 증오가 마음속에 가득하지 않은가? 
-주어는 ‘너희’다. “(너희는)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가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명령도 ‘남에게 주어라’가 아니라 ‘주어라!’다. 공동체에서는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는 미워하면서도 마지못해 용서하는 척하며 주어서는 안 된다. 주는 것에는 어떤 판단도 필요치 않다. 그저 주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누가복음 6:37-38)

누가복음 6장에서 ‘하늘나라’ 공동체는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고 가난의 복을 선포하면서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공동체는 제자들을 통해 오늘날 교회로 이어진다.

예수는 가난을 축복하고 가난한 자에게 하늘의 상을 약속했다.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제자들은 가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과 부는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난한지를 따지는 대신 모두가 함께 가난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난해지려는 행위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제자들은 가난한 상태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부자인 채로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면 자비를 베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부자인 채로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저주다. 당신이 예수의 제자라면 얼른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사랑과 자비를 행하고자 할 때, 보통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를 따지게 된다. 특히 오늘날 한국사회처럼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진 사회에서는 자비를 베풀 곳을 찾기란 어렵다. 부자들은 후원해줄 ‘만한’ 사람들을 찾는다. 그래서 사회복지 기관들은 극단적인 사례들을 찾아내어 때론 대역을 내세우면서까지 도와달라고 광고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례는 매우 드물며, 실제의 경우엔 이미 많은 후원이 제공됐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식의 행동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가난한 자는 부자의 자기만족의 대상이 되며 부자는 자신들 만의 성을 쌓는다. 이 경우 진정한 공동체는 요원하다.
 

공동체가 지녀야 할 태도

위의 성경 구절은 ‘새번역성경’에서 가져왔다. 아마도 번역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 같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남을 용서하여라.’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을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 번역본은 예수의 명령인 이들 문장에 목적어(남을)가 있다. 심판과 정죄와 용서의 대상이 ‘남’ 즉 타인이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 그것은 오해다.) 얼핏 보면, 예수는 축복과 저주를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로 나누어 말하기 때문에, 심판과 정죄와 용서의 대상은 가난한 제자 쪽에서 보면 부자 제자를 향한 것이 되며, 부자 제자들 쪽에서 보면 가난한 제자들을 향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가난한 제자들은 부자 제자들을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용서해야 하며, 부자 제자들 역시 가난한 제자들을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늘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럴 경우, 심판하지 않음과 정죄하지 않음과 용서함은 타인을 향한 ‘행위’가 된다. 상대에게 심판과 정죄할 거리가 있고 그래서 용서할 일이 있음을 전제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난한 상태가 되기 위한 ‘행위’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예수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원수 사랑과 자비의 세부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말한 ‘행위’를 다시 중언부언할 필요가 있을까?

심판하지 않음, 정죄하지 않음, 그리고 용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난을 실천하기 위해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는 ‘남’이라는 목적어가 없다. 그저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해라’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명령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를 이루게 될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관한 것이다. 가난한 상태의 공동체가 되려면 제자들은 누구나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교회 안을 보라. 아무도 심판하지 않고,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며, 용서가 가득하다. 그러나 교인들의 태도도 그러한가? 온갖 판단과 저주와 증오가 마음속에 가득하지 않은가? 예수는 ‘겉천속마’(겉은 천사지만 속은 마귀)의 공동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명령에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머지 두 문장의 형태도 같다.) 이 문장에서는 ‘새번역성경’이 우리말 번역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교인들의 바램을 친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주어가 하나님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이 타인을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면, 하나님도 당신을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조건적 행위가 하나님의 상응하는 보답의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근거가 되는 이런 해석은 정말이지 바람직하지 않다.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다. 명령문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주어는 ‘너희’다. “(너희는)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가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자!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 모두의 ‘태도’가 이렇다면, 누구도 심판받거나 정죄 받거나 심지어 용서받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공동체의 행동 원칙

이런 태도를 지닌 공동체에서는 오직 하나의 행동 원칙만이 드러난다. 그것은 ‘주는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명령도 ‘남에게 주어라’가 아니라 ‘주어라!’다. 공동체에서는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는 미워하면서도 마지못해 용서하는 척하며 주어서는 안 된다. 주는 것에는 어떤 판단도 필요치 않다. 그저 주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에도 뒤따르는 문장에서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다. 주어는 ‘그것’이다. 즉 당신이 어떤 판단도 없이 준 바로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 즉 ‘주는 행위’에는 어떤 판단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준 것처럼, 당신도 나에게 줄 것이므로 그것은 되돌려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게다가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주는 행위는 1대 1의 교환이 아니므로, 그것은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되돌아올 것이다. 선택적 판단은 공동체를 분열시킬 뿐이다.

예수는 원수 사랑과 자비를 행하기에 앞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한 것이다. ‘준다는 것’은 가난해진다는 것이며, 이는 곧 하늘의 상을 받는 것이며 나아가 하늘나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지만, 여기에 우선적인 조건이 있다.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주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반갑게 마주 잡고 나누는 악수와 상대방을 향한 배려의 몸짓과 따뜻하게 건네는 미소를 생각해 보라.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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