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살다, 길을 묻다 ① - 홍영택 교수(전 감신대 목회상담학) / 〈나를 바라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의 저자

“사람들의 마음에 공간을 주는 예배,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 있는 예배여야”

“개인이 살아가는 것은 성숙의 과정. 신앙의 과정도 역시 성숙의 과정이어야”

교회 중심주의, 목회자 중심주의시대의 폐해 너무 많았다…개인주의가 중요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를 바라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 책의 저자 홍영택 교수. 
<나를 바라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 책의 저자 홍영택 교수. 

10년 후에 전체 성도 중 50%가 가나안 성도가 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도록 소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본지 기사(http://www.ingn.net/news/articleView.html?idxno=41486)에 독자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우리의 환경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런 중에 만난 책이 <나를 바라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KMC)였고, 저자 홍영택 교수(감신대 은퇴)였다. 학교에서도 은퇴 이후에도 상담을 통해 사람을 세워나가는 일을 하고 있는 그와 우리 시대의 신앙과 교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역시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에서 여유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고, 예배에서 설교의 비중이 너무 비대한 점을 우려했다.
 

▦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은퇴하고 평신도를 위한 책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 평신도와 교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동안 평신도에 대해 책을 쓴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앙이야말로 인격적으로 통합하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 부분에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신앙에 삶과 인격이 연결돼야 하는데, 많은 경우 고립되고, 치우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인격을 치유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이 아닌 편파성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80년에 감신에서 엠디비(M.Div, 목회학)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목회자가 아닌 학자로 가르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학생들 중 똑똑한 이들은 유학을 갔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당시에도 했습니다. 신학교는 목회자를 키우고 교회를 섬기도록 해야 하는데, 너무 학문적이기만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교수하면서도 교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모순과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현재 교회 문제나 과제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기여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이 책에서는 인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욕망도 상처도 감정도 아니다, 인격이다’, ‘성경은 사람이 영혼을 가진 인격적 존재라는 데 결정적 가치를 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신자들의 배타성이 너무 강해서 상대적인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말들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격을 말씀하신 것인지요.

그렇게 배타적으로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 우리들의 궁극적인 길이나 목적을 찾아가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헌신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교회가 목회자 중심의 조직 단체를 키우고, 단체 자체를 키우는 목적에 개인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가 갖고 있는 독특한 관점 때문에 삶의 전체적인 것을 살피고, 돌보고, 키우기보다는 종교 자체 관점에 갇혀버리고, 사람들을 어떤 전인적인 존재로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종교에 헌신하는 개인으로 그쳐 버리게 되는 경우들이 한국교회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교리, 예배, 헌금에 충실해야 하지만 회의나 의심이 들 때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풀어내면서 개인 인격 속에서 발견되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오히려 방어적이고 비판하게 되면 신자들이 정직하게 자기를 대면하고 성찰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찰을 금지하는 종교성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찰은 (교회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로 위험하거든요. 목회자의 권위를 지키는 데 위험하고, 단체를 존속하는 데 위험하고, 개인이 단체에 헌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데 위험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찰이 자꾸 배제되는 것입니다. 성찰하는 것은 교회 단체에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 중심주의, 목회자 중심주의시대의 폐해 너무 많았다개인주의가 중요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우리 교회에서는 성찰이라는 용어가 익숙하지도 않고 중요시하지도 않는 풍토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개인에게 성찰이 없으면 현재 남아 있는 것조차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는 아마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교회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데, 그게 잘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 아시듯이 우리나라도 이미 세계적으로 문화 흐름의 첨단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주의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에게는 이제 ‘나’가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신앙도 내가 믿고, 찾고, 의미를 얻고, 나한테 중요해야 갖게 됩니다. 저는 이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교회 중심주의, 목회자 중심주의였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의 폐해가 너무 많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별히 젊은 이들에게 그렇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방향 중 하나를 얘기하자, 자신에게 의미 있는 신앙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확신을 갖고 책을 썼습니다.
 

▦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그런데 그렇게 평신도들이 신앙을 찾아가는 데 교회에서는 여전히 준비가 미흡한 것 같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200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비슷한 설교, 말씀대로 변화되지 않는 교회 공동체, 오히려 가식과 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 한다는 얘기들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현재 그들을 향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는 현재의 모습에서 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200만 가나안 성도가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하고, 신앙과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데 안되니까 갈등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헤아려야 합니다. 저는 너무 이해가 됩니다.
 

▦  가나안 성도들은 그저 왔다 갔다 하는 성도가 아니라 한 교회에서 굉장히 열심히 했고, 헌신적이었으며, 새로워지려고 애썼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교회가 이들을 품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 그분들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됩니다.
 


목회 방향에 근본적인 선회가 필요하다. 설교에 너무 치중돼 있는 예배가 아닌 그 모든 공간 속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고 누릴 수 있는

▦  일반적인 목사님들은 그들을 ‘이해한다’며 공감하기 보다는 그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 현장이 성찰의 의미,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하니 훈련도 안 되는 환경인데,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사실은 교회에, 목회 방향에 근본적인 선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게 중심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경험하는 신앙, 의미, 하나님이 되려면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교회들에는 공간이 없어요. 빈 틈이 없습니다. 모든 게 다 짜여 있어서 성찰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뛰쳐나오지 않고 발버둥 치려면 공간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성도에게는 원칙이 정해져 있어서 거기서 조금이라고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안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것이 갑갑해서 교회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교회 안에서 발버둥 치면서 이거다 하는 것을 잡아갈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교회 밖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근본적인 방향 선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방향 선회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교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예배에서 방향 선회를 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성례 중심으로 흐르면서 메시지, 복음 선포가 약해졌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개신교회 예배에서는 설교의 중요성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설교에서 은혜 받으면 그날 예배가 성공이고 아니면 실패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게 아닙니다. 예배라는 공간 속에서, 앉아 있는 한 사람들 영혼이 하나님의 공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간이 얼마나 무한하고 넓고 유연한지,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설교로 승부를 걸고 사람 마음을 잡아야 하니 목회자는 얼마나 마음이 다급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공간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걸 봐야 합니다.

평신도도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목사는 설교하러 예배를 시작하고, 설교는 설교 들으러 교회 가고 하는 이런 곳에는 ‘공간’이 없습니다. 가톨릭 미사처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에도 새로운 예배 시도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공간을 줄 수 있는 그런 예배가 필요한 거죠. 사람들의 마음에 공간을 주는 예배, 개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예배여야 합니다.

집 거실에서는 앞마당의 잔디와 들풀, 꽃들이 훤하게 펼쳐져 있다.
집 거실에서는 앞마당의 잔디와 들풀, 꽃들이 훤하게 펼쳐져 있다.

교회 프로그램도 영성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은 목회자 스스로 마음의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큰 교회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작은 교회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다 급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목사님이 마음의 공간을 가지고 개인을 만나든, 예배를 드리든, 교육을 하든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성찰의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 성숙은 인격적 성숙의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거기에 더 근원적인, 더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심화되는 것이어야 그런 과정에서 성찰은 언제나 필요하다 

▦  이 책에서는 교회가 성숙하고 돌봄과 치유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 자체로,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향해 가자는 잔잔한 독려에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성숙함은 성찰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숙함에는 인격적인 성숙함, 신앙적인 성숙함이 있습니다. 저는 책 제목을 원래 ‘성숙한 인격과 성숙한 신앙의 만남’으로 정하고 쓸 정도 성숙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습니다(출판사의 권유로 바꿨지만).

인격적 성숙은 성찰을 통해서 인격의 다양한 측면들을 이해하고 통합함으로써 균형잡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런 인격적 성숙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신앙적 성숙은 인격적 성숙의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거기에 더 근원적인, 더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심화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성찰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 지도자가 되든, 상담사가 되든, 목회자가 되든 멘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것은 성숙의 과정입니다. 신앙의 과정도 역시 성숙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갑자기 이게 신앙이라고 던져준다고 해서 신앙일 수 없습니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통합되어가는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숙의 과정이야말로 개인의 인격, 신앙의 과정에서 볼 때는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가 사실 그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교회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며 신앙과 삶에서 잘 지내고 있나, 잘 자라고 있나 하며 격려하고 독려하면 좋겠습니다. 이건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고 삶에서 다가오는 여러 가지 고민이 있는데 정해진 이야기 외에는 하지 못하는 교회 분위기이니 성숙이 아닌 '자기들끼리의 리그'라는 느낌이 듭니다. 성숙을 향해 어떻게 노력해 나가야 할까요.

찾아보면 그 방향을 가지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저도 영성 공부하느라 영성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이들과 오랫동안 친교를 가졌습니다. 성공회나 감리회, 장로교 등 영성에 관심 갖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성 공간이나 프로그램, 워크샵을 개설하는 곳도 있습니다. 개인이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기회는 많이 열려 있습니다.

 

▦  ‘나의 확장을 통하여 이웃과 사회와 세계를 온전히 품는 사랑의 영으로 성숙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고 참된 나의 모습’이라고 하시며 ‘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풀어가시는 부분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얘기하고 있는 부분과 좀 다른 표현 같아서, 혹시 목회자들한테 항의 전화를 받지 않으셨을까 하는 염려도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좀 걱정은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상담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죄의 문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비신자 상담가들의 많은 경우 교회를 싫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상담하러 오면 불필요한 죄책감을 안고 오는 이들이 많은데, 왜 교회에서 그런 죄의식을 갖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실 개개인은 누구나 다 심리적인 방어로 죄책감을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교회 관점으로 강화시키게 됩니다. 의도하지 않지만 그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교회가 조심하지 않으니까 그런 결과가 생깁니다.
 

▦  프롤로그에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의 배후에는 나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의문이 담겨 있다’라고 써 있습니다.

사실 저도 죄책감을 많이 갖고 산 사람입니다. 신학교 간 것도 어쩌면 그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삶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하면서 교수로서 지낼 때보다 마음이 가볍고 보람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더 명료해지고, 나 자신이 긍정적으로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찾고 싶은 열망으로 예배 드리는 신자들 실망시키지 말고 하나님 만나는 기쁨과 초월을 경험하면 얼마나 좋을까?

▦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성찰해 볼 것을 권하고 계신데요, 사실 이 질문을 하는 것 자체로 생각하는 공간이 넓어질 것 같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설교를 할 때가 있는데, 예배시간에 사람 수가 많든 적든 청중을 보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감동입니다. 어떻게 여기에 와서 앉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일주일 동안 일하고 엄청 피곤할 텐데,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앉아 있는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싶은 열망일 겁니다. 교회가 그 열망에 찬물을 끼얹지 말고, 실망시키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초월을 경험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  설교를 통해 그런 부분에 도움을 주려고 목사님들도 노력을 많이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설교를 일주일 동안 너무 많이 해야 하는 목회자의 부담을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새벽예배나 수요예배를 영성의 방식으로(시편 본문을 정해서 읽고, 침묵기도 하고, 말씀을 나눌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말씀이 설교이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 경험했으면 된 것인데, 우리 교회 환경에서는 꼭 설교로 감동을 줘야 하니, 듣는 자나 받는 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  묵상은 어떻게 하고 계시고,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는지 들려주세요.

묵상은 생각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히 떠오르는 하나님에 대해 경험하는 것이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한 시간, 오후와 저녁에는 좀 짧게 하루 세 번 묵상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여기서는 풀, 꽃, 텃밭을 일구며 사는 삶입니다. 집과 텃밭까지 500평인데, 풀이 많이 보이지만 틈틈이 꽃도 많이 있습니다(웃음). 이 정도 일구려면 땀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밭을 일구며  노동하고 책 읽고, 줌으로 상담해주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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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택 교수는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M. Div)에서 수학했으며, 덴버 대학교 일리프 신학대학(Iliff School of Theology University of Denver)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감신대에서 목회상담학 강의를 하고 20212월 은퇴 이후에는 파주시 광탄면 산기슭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들꽃언덕 상담·영성센터간판은 아직 달지 못했지만 주로 줌으로 상담을 하고, 꽃과 과실나무를 가꾸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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