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제자들은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을 실제 일어난 일로 체험했다. 예언자들의 활동과 기적이 하나의 예시인 것과는 달리,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그때로부터 영원히 실재해야 한다. 한편 그 나라가 영원한 것이라면, 그 나라에 참여한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메시아 예수와 더불어 영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부활을 향한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통해 영원한 나라에 참여 한다.

이것이 당신의 신앙고백이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당신은 어떤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가? 아니, 어떤 사람이라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자.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을 만한 사람이 있는가?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누구라도 영원히 함께 살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은가? 나쁜 사람은 물론이겠지만 착해 보이는 사람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반대로 생각해야 답이 보인다. 영원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영원한 삶의 조건은 하나님의 품성을 닮는 것이다.

타인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나의 문제다. 영원한 삶의 가능성은, 지금 실재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하고 있는 타인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가 메시아로 이룬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실재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에 속한 사람들(예수가 힘주어 말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어린이들이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영원한 나라도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오히려 견디기 힘든 지옥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만한 훈련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후서 1장을 통해 이 훈련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3-4)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본성과 일치됨으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메시아로 보내어 죄로 가득한 우리를 구원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닮아가는 것이며, 이는 덕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덕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 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 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5-7)

베드로후서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는 기초와 완성에 해당하는 두 본질 사이에 세상의 철학적 가치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덕(goodness), 즉 선함이란 고대의 가장 중요한 도덕 개념이며, 당시 헬레니즘의 궁극적 이상이었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세상에 드러냈던 하나님 나라는 바로 ‘믿음 위에 세워진 선한 것’이다.

예수는 믿음을 드러낸 사람들 위에 ‘연대의 정과 의지’(필자가 이해하는 compassion의 의미다)로 세운 하나님 나라, 즉 죽은 자를 살린 것, 눈을 뜨게 한 것, 걷게 한 것, 병을 고친 것, 배고픈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 등은 ‘덕’ 즉 선을 이룬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고백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믿음이란 신앙의 기초 위에 선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선을 쌓아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더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지식, 절제, 인내, 경건과 신도 간의 우애가 그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고 또 영원하다면 이런 덕목들이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당신이 소명을 받고 신앙고백을 통해 무언가를 실천하고 있다면(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고백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철학적, 도덕적 가치들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참된 지식이 필요하다. 시대적 필요와,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한다. 지식에 게으르다면 그러한 실천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채 악으로 전락할 것이다. 절제는 잘못을 막아준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절제하지 못하고 성질을 부린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인내는 절제할 수 있는 힘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다. 경건은 이익을 바라지 않는 타인을 위한 헌신의 기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그 나라를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우애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만의 왕국으로 전락해버린 집단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점점 이런 모습으로 변해가는 노쇠한 교회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신앙의 절대가치인 이타적 사랑을 더한다면 비로소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는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고백 위에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면, 그들은 ‘덕’(goodness)의 가치들을 실천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라는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8)
 

덕에 충실할 때 하나님 나라라는 열매가 맺어진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데 부족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메시아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로부터 깨끗하여져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을 잊어버린 채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근시안이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9)

죄 가운데서는 덕을 이루는 지식도, 절제도, 인내도, 경건도, 우애가 발현될 기초도 모두 없어져버린다. 반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졌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굳건히 세워가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10)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그 가운데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들을 동료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실제적인 훈련 없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상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calling) 선택한(election)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의 뜻을 알고 확실히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알고 있고, 또 받은 진리에 굳게 서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을 두고서 여러분을 일깨우려 합니다.”(11-1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포기한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 속성은 늘 죄에 가까워 하나님의 부름과 선택에도 불구하고 곁길로 빠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고 영원한 나라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의 하나님은 죄에 반복적으로 빠지는 우리를 다시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현장에 세운다.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적합한 자들, 즉 자신의 성품을 닮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본성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추상적 지식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경험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이다. 한편 일회적 경험으로 충분한 지식도 아니다. 따라서 소명 받은 성직자라면 베드로후서의 저자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해한 스승답게 교인들에게 끊임없이 이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성직자들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보이지 않는다면(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깨달은 평신도들이라도 서로를 권면하고 격려하자.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