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12.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유혹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한 사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나를 따라오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도 자신의 윤리적 옳음을 주장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오늘날 교회는 세상 속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고 있다. 영향력을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세속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고결한 가치를 버리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교회의 세속화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세속화의 원인과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적어도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힌다(누가복음 9장 51절 이하).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예수와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세 사람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한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57) 그는 분명 멋진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십자가였다.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58)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유혹은 바로 예수를 따라나서는 순간 시작된다. 따라나선 자는 무언가를 기대한다. 그것은 성공과 부, 축복과 명성이며 혹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어긋난다. 사실 처음에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유혹이다.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따라나선 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어코 얻어낸다. 그것이 사탄에 굴복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애써 외면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든지 따라나서겠다고 하지만, 그 길이 바로 이것이라고 예수가 제시할 때마다 결심을 번복하곤 한다. 필자는 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신학대학원생들과 대화한 적이 있다. 왜 목회를 하려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가는 길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의지가 굳건해 보였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우리 공동체 리더들은 정부나 사회단체로부터 어떤 급여도 받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이러한 공동체가 자신들이 기대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유혹은 예수가 ‘나를 따라오라’(59)고 말할 때다. 예수는 우리 삶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와서 이제 그를 따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그때 일어난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59) 일생에 한 번뿐인 일이 바로 그 순간 발생하다니! 이 일만 아니라면 예수를 바로 따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은 언제나 우리에게 단 한 번뿐이며,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60) 예수는 ‘그러한 일은 네가 하지 않아도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바로 그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밖에 없는 일, 그것도 관습과 윤리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가 당신을 부를 때마다, 그 부름을 회피할 만한 ‘대단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하라는 일보다 자기 일에 먼저 매달린다. 필자가 실습 중인 신학대학원생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바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도사로, 신학생으로, 혹은 사람들을 돕는 일로 정말 바쁘다. 40여 명의 신학생들이 이번 학기에 우리 공동체에서 매주 한 번씩 8번의 실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졸업에 필요한 3학점을 얻게 된다. 우리 공동체는 그들과 약속한 시간에 ‘우리를 따라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온갖 이유들을 대며 시간 변경을 요구하거나 출석 인정을 요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만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61)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세 번째 유혹은 과거와 결별하는 문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있다. 하지만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 어떤 이유로든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과거에 붙들리고 만다.

예수를 따라온 사람은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별 인사를 미리 하고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예수를 따라야지’ 하며 마음먹는 그 순간, 지금까지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던 과거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과거로 돌아간다. 하지만 다시는 예수에게로 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일로 ‘예수를 따라야지’ 하지만, 이번에도 또 다시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이것이 따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이다.

필자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리더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공동체를 만드는 순간, 세상적인 일자리를 포기했다. 가끔 이 길을 소명으로 여기고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길에 들어서기 전에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분명한 것은 그렇게 먹고사는 문제를 먼저 해결했던 이들이나 우리 공동체의 리더들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는 ‘바로 그때’ 소명을 따라 공동체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에는 따라나선 사람들과 예수 사이의 간격이 드러난다. 바로 이 간격이 세속화를 향한 사탄의 유혹이 자리 잡는 공간이다. 이 유혹은 간교하여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까지는 예수를 따라갔을 것이다.)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앙이 좋은 사람, 끈기가 있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교회에 열심인 사람일까? 아니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한 사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나를 따라오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도 자신의 윤리적 옳음을 주장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만’이라고 한 사람도 과거를 돌아다보는 한 예수를 따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착하고 성실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한 신학생들을 보면 정말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대신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자신의 생각이 먼저인 한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앞섬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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