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13. 더 나은 것 선택하기-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사실 마르다도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습관에 매몰되어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데 실패하면서 과거로 되돌아 가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분명 ‘좋은 것’을 선택했다면 빼앗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선택을 포기하고 되돌아간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되돌아갈 때, 겉으로는 예수를 배반하면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예수께 충성한다면서 되돌아간다. 이들을 통해 예수는 신격화되며 그를 감싸는 건물은 점점 더 화려해진다.

 

데이비드 윌키(David Wilkie), 기도대 앞에 무릎 꿇은 소녀
데이비드 윌키(David Wilkie), 기도대 앞에 무릎 꿇은 소녀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10:38)

한 여자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일행을 위해 자신의 집을 개방한다. 예수 시대의 풍습으로 보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르다에게는 시대와 유대교가 지배하는 관습을 아랑곳 하지 않으면서까지 진실을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

더 놀라운 일은 마리아에게서 보인다. 예수의 발 가까이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제자의 위치에서 말씀을 듣는 이가 다름 아닌 여자였다.

엄격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집)주인 됨과 여성의 제자 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등장은 이후 세워질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상징이다. 예수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 ‘더 나은’(better) 길을 열 것이다. 더 나은 길을 선택한 사람은 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신들을 짓눌러온 과거와 결별하고 있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더 나은 길을 선택하고도 습관화된 태도 때문에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습관화된 도덕률이 과거에 붙들리게 한다

예수와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다가 한 마을에 들어간다. 그 마을에는 마르다란 여인이 살고 있는 집이 있었다. 성경학자들은 이 집을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베다니의 나사로와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일행을 집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형식적이라도) 나사로여야 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집을 개방하고 예수의 일행을 맞아들인 사람은 마르다였다. 그리고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파격적이게 만든다.

그런데 마르다는 집을 개방하고도 말씀을 듣지는 못했다. 말씀을 듣거나 듣지 못한 차이는 어찌 보면 분주함과 게으름의 차이처럼 보인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40) 하지만 마리아는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대접하는 일에는 게으를 수 있었고 예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는 구시대의 도덕률에 게으른 자가 맞이할 수 있다.

 

분주함은 미래를 향한 꿈을 포기하게 한다

예수가 열게 될 새 시대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지속될 것이다. 제자들이 하게 될 모든 일은 그의 말씀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예수를 극진히 대접한다고 해서 그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다가 신경 쓴 접대는 예수가 가야할 길을 예비하거나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목사를 대접하는 일을 큰일처럼 여기는 교인들과 그것을 즐기는 목사들이 여전한 한국교회가 안타까울 뿐이다.

마르다는 벗어나지 못한 습관적 태도(도덕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로 인해 예수를 방해한다. 마르다는 예수의 말을 끊는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40)

마르다는 동생의 태도가 미워 죽을 지경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뭐라 할 이유가 없다. 집안에 남자 형제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해도,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다며 푸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과 같은 처지라 여겨지는 여동생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마르다의 생각과 이에 따른 항의는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도 마르다의 입장에서 한 마디만 해준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어떤 기준에 정당한 것일까? 그것은 관습이 된 현실의 기준에서 그렇다.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관습과 남녀의 역할, 제도적이며 종교적인 기준 등이다. 이러한 기준은 깨어져야 할 것이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로잡고 있다. 사실 그녀도 처음에는 그러한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옛’ 집을 개방하고 ‘새로운’ 예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꿈은 자신의 뼛속 깊이 습관화된 태도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마르다는 예수께 요청한다.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


빼앗기지 않으려면 더 나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마르다는 마리아마저도 과거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우리 역시 마르다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누가 한단 말인가?’ ‘누군가는 예수와 일행을 대접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습관에 사로잡힌 생각일 뿐이다. 예수는 아무도 시중들지 않았다는 핑계로 말씀을 전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고 식사를 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를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더 나은 것을 먼저 할 수는 있다.

예수는 마르다의 요청 속에 있는 구시대적 관습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

예수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면서 그녀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문제는 그녀가 많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많은 일은 과거의 세상이 여성에게 부과한 것들이다. 보수적인 세상은 여성에게 점점 더 과중한 일을 부과해 왔다. 그것에 길들여지고 익숙한 여성들은 한도 끝도 없는 일들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끼며, 자신과 같은 여성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강한 연대감이 더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감은 연대적 의무감을 갖도록 한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연대 속에 있는 같은 여성을 향한 억압으로 드러난다. 사실 해야 할 일은 많다. 집안 일만 하더라도 육아, 청소, 빨래, 등 온갖 것들이 있다. 손님을 대접하다 보면, 상을 차리고 차려도 준비할 것은 여전히 보이기 마련이다. 이렇게 점점 많아지는 일이 염려를 가져온다. 예수는 이런 마르다에게 말한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2)


필요한 일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다

여기서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란 해야 할 일이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는 이 좋은(better)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

좋은 편은 빼앗길 수 없는데, 그것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다도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대적이며 관념적인 시선을 무시하고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습관에 매몰되어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데 실패하면서 과거로 되돌아 가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분명 ‘좋은 것’을 선택했다면 빼앗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선택을 포기하고 되돌아간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되돌아갈 때, 겉으로는 예수를 배반하면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예수께 충성한다면서 되돌아간다. 이들을 통해 예수는 신격화되며 그를 감싸는 건물은 점점 더 화려해진다. 그들에겐 예수를 대접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하지만 해야 할 많은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우선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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