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1. 저출산과 다문화 사회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 된 평등한 세상을 지향한다.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다면, 국적과 인종과 지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모든 다름은 평화 속에서 공존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를 환대해야 한다. 환대는 타인을 공동체로 이끌며, 서로 형제자매가 되도록 한다. 환대가 없어 공동체가 깨어진 곳에는 반목과 질투와 경계와 시기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산술적으로 0.7명대의 합계출산율을 적용하면 2067년 우리나라 인구는 3,500만 명을 밑돌게 된다. 게다가 인구의 1/3 가까이는 노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분석의 정확한 의미는 현재의 출산율대로라면 40년 후, 우리나라 인구 중 1,500만 명은 이주민과 외국계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출산율의 변동에 따라 원주민과 외국계의 비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 원주민과 이주민의 결혼으로 출생한 한국인의 비율이 늘어날 것이므로, 어느 시점에 이르면 원주민과 외국계 한국인의 구분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럼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출산율을 높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정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감에 편승한 한반도 태생의 동일언어 원주민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한민족’이란 말로 민족주의 정체성을 드러내왔는데, 이는 한반도 출생 부모와 조부모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출생지와 언어를 근간으로 하는 ‘민족주의’ 혹은 ‘민족 정체성’이란 말은 이제 쓰지 말아야 한다. 다문화 사회의 국가정체성이란 민족주의가 될 수 없다. 다문화 사회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미국에서의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국가는 출산과 이민정책을 통해 적절한 인구, 특히 생산연령인구를 유지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저출산은 국가적 과제가 된다. 한편 인구문제는 시민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국가의 주권자로서의 시민은 출산이냐 아니면 이주민 유입이냐를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시민 개개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출산율에 따른 시민의 필연적 선택이 된다. 개인적 선택의 결과로 마주하게 될 필연적 선택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출산율에 따라 적절한 이민정책을 통해 인구를 유지한다.

기성세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 신세대를 보면서 우려한다. 그 우려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기성세대를 부양할 젊은 층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민정책 등을 통해 5,000만 내외의 인구는 유지할 것이다. 물론 외국의 사례에서 보면, 특히 유럽에서는 일자리, 범죄 등의 이유로 인한 반이민 정서가 꽤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이런 이유로 반이민 정서를 갖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다.(어떤 이유로도 반이민 정서를 긍정할 수는 없지만, 유럽 국가들의 출산율은 인구를 유지할 수 없는 우리와 다르다.)

10년, 20년 전 우리사회의 이주민에 대한 정서와 지금의 정서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주민을 차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출산율에 대한 걱정은 곧 사라질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한 세대 만에 사라졌듯이, 결혼과 비혼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달라졌듯이, 인구소멸을 전제로 한 저출산에 대한 공포도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 서비스는 충분히 받기를 원하면서도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싫다는 자기모순적인 사고일 텐데, 이런 사고 역시 곧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도와줄 사람이 없어 방치된 채로 혼자 죽어 가면서도 이주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주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의 고집처럼 이주민 없이 우리사회의 출산율에만 의존할 때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이주민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맞게 될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방치된 죽음을 맞는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해도 우리사회에는 ‘남아선호사상’이 있었다. 당시 그것은 말 그대로 거창한 ‘사상’이었는데, 지금 이런 사상은 흔적조차 없다. 놀랍게도 당시 교회나 사찰 등은 남자 아이를 갖고자 하는 부부나 이들의 부모들이 찾는 기도처였다. 종교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남자아이를 갖도록 기도해주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들은 지극히 비종교적인 낯 뜨거운 일을 했던 것이다.

또 한 때는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도 있었다. 가난한 시절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당시 자녀를 많이 낳았기 때문에, 우리사회가 고도성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말이다. 당시 국가정책에 적극 호응한다며 산아제한 캠페인을 한 교회가 있었다면 이 또한 낯 뜨거운 일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종교적,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노심초사하지 않으며, 자녀가 많다고 굶어죽을까 걱정하지 않듯이, 미래에도 한반도 출신 세대가 줄어든다고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정체성은 인구구성이 달라진다고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될 뿐이다. 생각해 보라. 현재 우리는 조선시대의 국가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 국가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출산율을 장려하는 캠페인인가, 아니면 차별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인가? 보편적 가치와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 정신에 따른다면 답은 명확하다.

시류에 편승하는 종교는 창피를 당할 뿐이다.

이제 교회는 국가 정체성 운운하며 또 다시 낯 뜨거운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는 태어나는 한 생명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축복해야 한다. 하지만 차별을 전제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 된 평등한 세상을 지향한다.

필자가 만나는 초등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이주민 자녀들의 비율은 50% 내외이다. 이런 현장에서 목회자가 이주민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며 한국인(원주민) 부모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 ‘민족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성직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가치에 무지한 행위이다.

다가오는 다문화사회는 혈연, 지연을 뛰어넘어 보편적 가치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다양한 문화들을 포용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하기에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같은 출신이고,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편협한 이기주의로 종말(국가소멸)을 재촉할 것이다. 교회의 메시지가 기독교의 본질에 부합할 때, 한국교회는 우리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타인을 환대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교리가 된(근본주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자들을 억압했던, 지금도 빠지기 쉬운 과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정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사회의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독교적 통찰 없이 한국교회가 출산율을 높이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일부 기성세대 지도자들의 근시안적 주장은 정말 한심할 뿐이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사회는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다면, 국적과 인종과 지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모든 다름은 평화 속에서 공존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를 환대해야 한다. 환대는 타인을 공동체로 이끌며, 서로 형제자매가 되도록 한다. 환대가 없어 공동체가 깨어진 곳에는 반목과 질투와 경계와 시기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선한목자교회)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