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14)=그리스도인의 두려움-1

어둠이 갖는 불확실성은 예수라는 존재를 희미하게 가리면서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런 두려움을 탓하며 제자의 길에서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두운 현실과 맞닥뜨려 애쓰고 있을 때 예수는, 우리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즉시’ 우리 곁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오병이어’ 사건(마태 14:13-21)을 통해, 무리들을 마을로 돌려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로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compassion)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예수가 마을을 벗어나 이 외딴 곳으로 왔던 이유는 스승인 세례자 요한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였다(13절과 23절 참고).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마태 14:22-23)

날이 저물자 예수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건너편으로 다시 보낸다. 동시에 배불리 먹고 만족한 무리들도 헤쳐 보낸다. 그리고 예수는 기도하기 위해 홀로 산으로 올라간다. 예수는 스승인 요한과 함께 했던 세상에서 건너와, 산 위에서 하나님을 홀로 마주한 것이다. 이제 예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길을 가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 나라를 이 세상 속에서 실현시킬 것이다.

비록 예수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과 하나님이 예수에게 준 소명은 숨겨져 있지만, 그것은 예수의 삶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드러나는 예수와 동행하는 삶의 진실성, 즉 그리스도인다움일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그리스도인다움을 방해한다. 두려움이 예수와의 동행을 막는다.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첫 번째 두려움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온다.

예수는 기도하기 전, 제자들을 배에 태워 다시 건너편으로 보낸다. ‘건너편!’ 그것은 미지의 세상을 상징한다. 물론 제자들에게 그곳은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는 그들의 일상이 있던 곳이었으며,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도 예수와 더불어 먹고 자고 여행하며 지내던 곳이었다. 그곳은 제자들이 늘 마주했던 익숙한 곳이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곳은 제자들이 예수와 더불어 다시 돌아가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된다. 우리 역시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에 살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와 함께 마주하는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인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건너간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일이다. 게다가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보다 먼저 보냈다. 인도자 없이 먼저 건너간다는 것이 불확실성을 배가시키고 있다.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24-26)

제자들은 풍랑에 시달리는 배 위에서 예수가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른 새벽에 만난 풍랑과 역풍은 제자들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어슴푸레한 미명 가운데 물 위를 걸어오는 예수는 그들에게 유령일 뿐이었다. 존재(being)가 환상(illusion)으로 이해되자,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예수가 물 위에 서 있는 동안, 예수라는 존재는 제자들에게 실재(existence)하지 않았다. 물리적 경험에 근거한 제자들의 이해의 틀 속에서 예수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당신에게 예수가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이 보는 예수가 경험적 현실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미명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 그것도 물 위에 서 있는 예수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잠자고 있던 당신이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고 상상해 보라.

사실 현실은 늘 고달프기는 해도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베드로 형제를 비롯한 어부들도 있었기에 풍랑이 일고 맞바람이 분다고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현실에서 뛰쳐나간 사람들이 아닌가! 제자들과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이란 현실이 아니라 예수가 보이지 않거나 환상으로 보일 때이다. 예수가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기만 하면 안심하고 잘 따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런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 없음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 없음을 탓하지 말라. 믿음 없음을 탓하는 것은 현실에 굴복하면서 더 나아가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며, 포기를 의미할 뿐이다. 믿음은 예수의 부재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수단이 아니다. (미리 밝혀두지만, 물 위로 내려선 베드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속에 빠져들자 예수는 믿음이 적다고 꾸짖는데, 그것은 예수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27)

예수는 자신을 유령으로 오해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전혀 비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는 ‘즉시’ 자신을 확인시킨다. 그것은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낸 자가 바로 예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들을 풍랑의 가능성 속으로 보낸 것이다. 예수가 그들을 두려움 가운데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풍랑을 견뎌보라고,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훈련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그런 의도는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해보라면서 떠밀지 않는다. 그것은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 스토리를 썼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러움에서 오는 잘못된 편견일 뿐이다.

우리에게 불신앙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킴으로써 곧바로 해결된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는 부족한 믿음 탓이 아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가지고 있는 본성일 뿐이다. 예수는 이 본성을 나무라지 않는다. 군인이 아니라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훈련을 할 필요도 없다. 아이에겐 부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혹은 믿음이 없다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는 먼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본문과 마가, 요한복음의 병행구절에서도 제자들은 예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이란 단지 예수라는 존재를 현실 속에서 실재로 인식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어둠 속에서 예수는 희미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이 느끼는 풍랑과 역풍의 현실은 놀랍도록 생생할 뿐이다. 어둠이 갖는 불확실성은 예수라는 존재를 희미하게 가리면서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런 두려움을 탓하며 제자의 길에서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두운 현실과 맞닥뜨려 애쓰고 있을 때 예수는, 우리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즉시’ 우리 곁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도 아이를 두려움 속에 혼자 놓아두지 않듯이 말이다.
 

김명현 목사 / 선한목자교회
김명현 목사 /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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