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
 
 내몽골 자치구에 와서 내가 곧바로 찾아간 곳은 박물관이다. 푸른 초원을 형용하여 웅장하고 우람한 대륙성 건축물로서의 모습을 뽐내는 네이멍구 역사 박물관이다.
각 층마다 전체적인 이미지는 징기스칸에 맞추어져 있다. 중국도 어떤 때는 징기스칸의 힘을 빌리고 싶을 터인데 몽골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내몽골은 외몽골과 함께 몽골리아 본토에 편입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의 절반은 중국이 차지하고 있어서 네이멍구는 중국 영토에 편입되어 있다.
몽골인들의 처지는 원나라 시대 이후 한국과 몽골족은 하나라고 자부했으니 원제국시대가 끝나고 만주족 지배시대가 왔을 때는 심지어 오늘의 시간에도 불만 없이 중국의 중국인의 되어야 했으나 그게 쉽지가 않다.
내몽골에는 몽골인들로 이루어진 인구분포는 아니지만 도시의 분위기가 몽골냄새가 난다. 상점의 간판들, 도로변에서 마주치는 다수의 사람들이 몽골인들만 같다. 그들은 중국인들보다 우리 한국인과 더 혈통이 가깝기에 내 눈에 그리 보이는 것일까.
내몽골 선교자료에 네스토리우스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모처럼 달려왔으나 넉넉한 자료는 없다. 안타깝다.
3층, `종교관'이랄 수 있는 한 켠에 쿠빌라이 앞에 나아가서 예를 올리는 서양인 모습의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접견실 뒷편에 2명의 서양인이 각각 선물을 손에 들고 있으며 중국인 관리들이 안내를 하는 그림이다. 서양인은 로마 가톨릭의 신부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로마 교황청에 원나라 치세기간 로마의 기독교를 앞세우고 싶어서 사제 100명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 부분 자료는 외몽골(몽골리아) 박물관에 그 서류가 있다. 명년 여름에 한번 찾아가 볼 계획이다.
원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이 `로마기독교'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라마불교가 로마 기독교 대신 원나라 치세의 중국정신을 지배했던 역사를 아는 입장에서는 시대의 숨바꼭질인 양 안타깝다. 쿠빌라이의 선교사 파송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아시아 기독교의 판세가 달라질 뻔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선교사 파송 요청시 로마교황청 사정이 여의치 않아 뒤늦게야 2명의 신부를 파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그때 그 사람들의 기록을 그림으로 표현해둔 것이 바로 저 그림이구나 하면서 역사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해 보았다.
4층에 올라가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십자가 그림을 한 점 발견했다. 바닥과 주변에는 연꽃이 무성하게 하늘거리는 중심 상단에 네스토리안들이 사용하는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감질난다. 중앙 아시아에 비하여 중국의 네스토리안들의 자료는 빈약하다. 우르무치 주변 투르판이나 돈황, 호탄, 캬슈가르 등지에서는 얼마간의 자료가 나온다. 물론 서안과 북경, 그리고 몽골리아 중심과 변경에도 그들 네스토리안들의 간절하고 목마른 발걸음을 느낄 수 있다.
연꽃을 밑자리로 삼아 솟아오른 십자가여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시대의 영감을 나는 얻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景敎)가 당나라 초기에 대륙의 중심에 섰을 때, 그때 성경 번역을 당태종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당시 알로펜 주교의 기반이 페르시아와 시리아였으니 로마의 언어로 중국인을 위한 성경번역이 어려웠을까? 아니면 `로마제국 기독교'가 네스토리우스파를 학대하고 이단 만들어서 추방을 했기 때문에 로마의 언어(헬라어)를 기피했을까? 수리아를 선택한 알로펜 주교는 인재난 때문에 성경 번역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 표기'에 혼선을 빚기도 했었다.
더구나 불교사상이 7세기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터라 별도의 `종교언어' 택정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천제, 상제, 유일자 등으로 하는데도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교언어'에 휘말리고 연꽃에 묻히기도 했을까? 그들의 전도 여행시 복장이나 행태가 불승들의 모습과 유사했음 또한 그들 시대의 제한된 현실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현지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길을 열어가면서도 때때로 단절의 느낌을 맛볼 때가 있다. 나의 간절함이 그들에게는 간절함으로 전달되지 않을 때를 말한다. 오늘의 현안도 숨가쁘게 바쁜데 묻혀버린 역사요 흘러간 노래일 뿐인 것을 우리가 마음 쓸 이유가 있는가, 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선교사님들 중에는 깊이 있는 연구에 상당한 학문적 성취까지 해낸 분들도 있고, 지난 9월 15일 주간에 만난 타지키스탄의 이 선생처럼 온 몸을 던지듯, 간절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다.
네이멍구 선생님들도 이 선생, 또 다른 이 선생님이 나를 도우려고 애를 썼다. 앞서 말한 이 선생은 여자 선생으로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네스토리안 유적지 `호허트' 지방 안내를 해 주었다. 3시간 이상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종점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야 하는데 요즘 도로공사 중이라 1시간 쯤 걸리고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면 새벽에 준비해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또 한 분 이 선생은 몽골리아에서 활동하다가 내몽골로 오셨는데, 명년도에 내가 가야할 몽골 방문계획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와 함께 내몽골에 있는 도교사원 방문에 동행을 해 주었다.
도교(道敎)의 몸체 어딘가에 네스토리안 기독교 사람들이 숨어들어갔을 것이다. 라마불교의 본당 안 어느 공간에 마치 주인처럼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삼자 교회가 쉽게 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 선생과 내몽골 따짜오사원(大召寺)을 찾아갔다. 중국 전역 어디든지 도교사원이나 라마불교 사원은 정부의 협조를 받아서 사원증축을 하거나 교세확장을 해 간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본심이 무엇일까, 공산당 정신과 일치하지 않은 자들의 종교정책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중국 사상은 공산당도 적응해내고 도교나 불교, 기독교 중세의 네스토리우스를 다스리고 (오늘의) 유럽식 기독교는 삼자(三自)의 이름으로 중국식 기독교를 만들어 농부가 저보다 힘쎈 황소를 부려 밭갈이 하듯이 다스리고 있는 것일까?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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