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여, 우리들 여기에 있습니다

 네스토리안들의 중국생활을 어느 만큼은 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중국의 3자교회(三自敎會)와의 사귐은 내게 큰 의미를 암시해 주었다. 내가 AD635년 이후 중국 네스토리안들의 활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들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현역’으로 인류와 더불어 ‘역사의 해법’을 찾고 있었다.
내게 있어서 네스토리우스와의 관계는 종종 말했던 대로 오래 전부터 였다. 참으로 열심히 그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30여 년 전 장편소설을 한편 썼으나 미숙하다 싶어서 지금도 장롱 속에 묻어두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넉넉한 자료와 편법의 보완 등을 통해서 독자와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내몽골에서 라마북교의 사원과 도교사원을 번갈아 찾아다니면서 혹시나, 하면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찾고 있다. 로마에서 시작한 발걸음, 리비아 사막과 이집트 사막, 그리고 시리아 사막을 헤매고 다니면서 바람결에 흩날리는 네스토리우스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으며 터키의 에뎃사, 지금의 이라크 땅을 니시비시와 크데시폰, 그리고 이란으로 가서 곳곳을 찾아다니다가 우즈베키스탄의 타쉬겐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를 지나서 페르가나 골짜기를 뛰어 넘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키르키르스탄의 전토를 휘돌았으며, 타지크스탄, 신강 위구르 지역은 물론 중국의 넓은 땅을 휘돌아서 현재 내몽골에서 또 사람을 찾는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역사는 학자들간 교감을 하고, 서로가 인정하는 수준의 자료는 보편화 되어 있다. 내가 지난 20여년 가까운 날들 동안 정성을 들여 찾아다닌 해외여행은 앞서 열거한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고, 어제 내 생각이 가까이 더 가까이로 네스토리안들의 이야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혹시 한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전해오는 저들의 입소문 이야기를 아는 이들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었으면 한다.
3년 전부터는 터키, 이라크, 이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을 다녀오기도 하였고, 몇 번씩 거듭 다녔으며, 2008년도에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 깊숙한 곳까지 탐사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3년 전부터 중국의 삼자교회에 공을 들인 결과 나는 축복과 행복을 함께 얻어냈다. 축복은 하늘과 땅이 함께 주는 복이고, 행복은 세상나라의 복이다. 삼자교회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니다가 삼자의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중국가정교회 선교사들은 ‘삼자교회’를 잘못된 교회로 보는 것 같으나 잘못된 교회가 어디 삼자교회 뿐이던가.
삼자교회가 무엇인가? 중국 공산당들이 교회의 필요성을 거부할 수 없어서 받아들인 중국식 기독교이다. 현대중국정신에 의한 기독교 중국화의 실체인 것이다.
서구식 기독교가 말하는 삼자교회는 교리적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했고 도덕적으로는 1949년 이후 서양 선교사들과 그들의 동지들인 중국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을 추방하고 학대할 때 삼자교회가 고발자의 자리에 있었다 하여 용납하지 못한 줄 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중국의 삼자교회는 서구식 기독교의 약점을 많이 보완하고 있다. 앞으로 교회개혁을 해갈때 주요하게 대접받을 부분이 자양(自養)이다.
각성하고…, 나는 삼자교회를 생각 할 때 중국 공산당 운동과정에서 일어난 소용돌이로 피해서 생각해 보고 있다. 내가 지금 숨죽여 기대하는 것은 중국의 삼자교회 신자들 중 네스토리우스 교단(경교,景敎)신자들이나 목회자(선교사)들의 숨은 이야기나 전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지금까지 그들 삼자교회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던 중에 가능하다는 느낌을 얻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의 선교역사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삼자교회는 내게 반문하였다. 나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활동과 그 정신적 자산을 말해 주었다. 내 말을 듣는 그들의 눈이 반짝인다. 내가 네스토리우스 이야기를 삼자교회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설명하는 깊은 뜻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독자들도 모르고 있다. 필자만의 숨겨둔 생각이 있으며 그것을 아직은 드러내고 싶지 않다.
중국의 삼자교회는 장차 중국이 자유세계로 완전 편입한 후 미국과 함께 세계질서의 쌍두마차가 될 무렵, 향후 1백여 년쯤 뒤가 될지 앞당겨 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에 중국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세력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삼자교회는 기독교 정통교리인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 사람의 모습이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자기정돈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1백여 년이면 유럽식 기독교 또한 ‘유럽식’을 내던져 버리고 기독교 본래의 모습에 적응해갈 것이다. 앞으로 16세기 개혁의 완성을 위한 향후 100여 년을 기독교는 책임지어야 한다.
기독교의 새로운 앞날은 그 모형이 곧 드러나겠으나 그때 삼자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중요부분이 새로운 날의 항목에 뛰어들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주요강점’또한 선택이 될 것이고 이슬람이나 유대교의 우수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들의 자원 또한 새로운 날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그날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네스토리안들을 깨우기 위한 고통스러운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 네스토리안의 모습의 여러 부분이 중국의 삼자교회 색깔 속에서 떠오르는 것까지 독자들에게 밝혀두는데, 독자들 중 필자가 말하려 하고 있는 것의 힌트를 통해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지혜로운 표현을 기다려 본다.
또 다른 방식으로 네스토리안들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곳이 도교(道敎)와 라마불교이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라마불교와 가까이 지냈음은 사실에 근거하지만 ‘도교’와는 거리가 있다. 네스토리안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지금의 ‘도교’와는 수준이 다른, 더 정확하게는 ‘도가 사상’을 가진 자들의 모임에 가까이 갔었다고 봄이 좋다.
무슨 말인고하니 중국의 당나라의 전성기 ‘도교’는 ‘도가사상가’들의 생각과는 차별이 있다. 도교는 종교형식을 지닌 것이요 도가道家), 즉 노자와 장자의 사상적 범주 안에 있는 학풍은 ‘도교’와는 그 품격이 다르다. 도교는 민간신앙과 미신들이 끼어들어 노자와 장자의 품위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지난주 내용 속에 일부 소개했으나 필자가 불교와 도교 사원의 선생들을 찾아다니면서 내 친구들인 네스토리안들의 안부를 묻는 과정 이야기는 2008년부터 연재필 작품의 내용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글을 마치면서, 필자가 꼭이 여러 뜻있는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기독교의 복원을 열망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필자가 반 백년의 각오를 통해서 끝끝내 이루어 보고자하는 그것을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거니 새해에는 본 지면을 통하여 네스토리우스의 아시아 기독교 제권을 연재할 것이다. 200자 원고지 30매 분량씩 50회 연재를 목표를 하고 있다. 2권부터 5권까지 또한 연재나 단행본 제작을 통해서 그리운 독자들과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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