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개혁자 위클립 ②- 탁발 수도단과 위클립의 대결 - `성직'이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끝없이 탐하는 구라파.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의 행위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못했다. 쓸만한 인재들이 탁발 수도단으로 가고 있으니 학교가 텅 비고, 산업인력이 부족했다. 그래도 교회는 탁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지행각을 하는 저들을 향하여 줄 교훈이 없었다. 승려들은 놀면서도 재산을 늘려갔다. 얻어다가 먹는 것 뿐 아니라 죄인들에게 `사면권'을 무제한으로 행사하여 흉악한 죄를 진 자들도 승려들에게 돈뭉치만 가져다 주면 사면이었다.  그러니 죄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죄를 지으면 승려들에게 가서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받는다. 도둑질하여 모은 것 일부를 승려에게 가져다 주면 승려는 도둑의 죄를 용서하고 그 대가를 받으니 그들은 동업자인 셈이다. 그러니 도둑들이 서로 짜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괴이한 세상 분위기가 되어갔다. 뜻있는 이들이 탁발 수도단을 개혁해 보고자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승려들은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으로 더욱 그 백성들을 비참하게 하였다.  겉으로는 가난과 경건을 내세우지만 그들은 교황령을 이용하여 일반인들이 교황과 더불어 사제나 수도자들을 숭배하게 만들었다. 이같은 행위의 반복으로 신자의 임무를 다한다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드디어 위클립이 일어났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내걸고 투쟁을 했다. 승려들이 교황의 칙령을 빙자하여 면죄부를 파는 행위가 불법이라고 규정하였다. 위클립은 탁발승단을 반대하는 논리의 책을 발행했다.  그들과의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성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위클립은 교황에게 사면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탁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에게 특별한 권세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교황도 한 사람의 사제(승려)일 뿐이라 하였다. 놀라운 주장이었다. 위클립의 시대에도 교황은 무오류의 신적인 존재라 하였는데 위클립이 교황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교황은 영국 국왕의 존엄에 간섭을 말것이며 세속의 통치는 국왕의 임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위클립은 영국왕의 사신으로 네델란드에서 2년간 일하는 동안 교황의 사절들과 만났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승려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장차 그의 활동에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영국에 돌아가서 이전보다 더욱 자신있게 자기 주장을 폈다. 그는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하는 면죄부 강매에 대해 `그들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자들의 생계비를 빼앗고, 해마다 수천 마르크의 돈을 성직매매 방식으로 훔쳐 갔다'고 주장했다. 위클립의 행동에 영국왕은 힘을 실어 주었다. 그의 신분이 상승되었다. 루터워드지역의 교구장에 임명받은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진노에 찬 위협이 그 가까이 와 있었다. 대학과 교구, 그리고 영국왕에게 교황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이단의 교사인 위클립을 당장 징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칙서가 당도하기 전부터 로마교회 감독들은 위클립을 법정으로 소환하였다. 하지만 위클립을 보호하려는 왕족들의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를 아끼는 두 왕족이 위클립을 동반하여 법정으로 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법정 난입까지 시도하려는 교황의 옹호자들에게 신변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감독들은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압력을 가했다. 위클립을 빨리 처단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쇠한 에드워드 3세가 세상을 떠나고, 위클립을 적극 옹호하는 왕족이 섭정을 하게 되어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칙서는 단호했다. 당장 이단자 위클립을 감옥에 가두고, 그를 화형에 처할 절차를 받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창 15:1) 하신 말씀의 하나님이 위클립을 지켜주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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