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형석 교수와 함께

● 일 시 : 2015년 3월 12일 신촌의 한 카페

● 대 담 : 김형석 교수(연세대 명예교수) / 조효근 목사(본지 발행인) 
 

▲ 김형석 교수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숭실학교와 제3공립중학교, 일본 상지대철학과를 졸업했다. 광복 후 1947년 탈북해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으며, 1954년부터 30여 년 동안 교수로서 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재직 중 시카고 하버드대학 연구 교수, 서울대, 고려대, 숭실대, 미국 오스틴(Austin)대학 등에 출강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한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론을 강조해온 그는 다수의 사상적 에세이와 학술서를 집필했으며, 96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강연 등 젊은이 못지않은 활동을 펴고 있다.

건강한가의 척도, 일하는 것


Q. 제가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1967년에 삼각산 제1기도원에서였습니다. 목회 지망생들이 수련회로 모였을 때인데, 그때 강의 마무리 결론으로 ‘증거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도마가 주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보지 않고는 내가 믿을 수 없다 한 말씀을 하시면서 오늘날 불확실한 시대에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증거를 보일 수 있는 복음을 전하라고 교수님께서 강력하게 당부하신 기억이 생생합니다. 표적을 원하는 사람에게 손의 못 자국,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라는 아주 도전적인 말씀이 지금까지도 제 가슴 속에 남아있어요. 벌써 50년 전의 이야기인데,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시나요?

A. 제 건강은 40대까지는 좋지 않았는데 50중반 넘으면서부터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어릴 땐 더 건강이 나빴고요. 왜 건강해야 하는가, 저는 일하기 위해서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4세 때 건강이 제일 어려웠어요. 하도 앓으니까 부모님도 나도 오래 못 살 것이라고 여기고 포기하고 살았지요. 그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중학교도 못 가고 내 인생이 끝나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니 의지할 데가 없데요.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해야겠다 싶어서 교회를 찾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허락하셔서 중학교 가게 해 주시면 제가 건강한 동안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어요.
제 어릴 때 약속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살아왔어요. 그 후에 생긴 습관이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위해 건강을 더 조심합니다.
나는 일하기 위해서 건강을 지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누가 건강한 사람인가?’ 할 때면 나는 체력적으로 누가 더 강한가보다는 누가 일을 더 많이 하느냐로 표준을 삼고 있어요. 지금 내 나이에 나만큼 일 많이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못 봤으니 참 건강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일 하라고 건강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히트작 <영원과 사랑의 대화>

Q. 제가 고등학교 때 교수님이 쓰신 <영원과 사랑의 대화>가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그때 제 기억으로 그 책 한 권을 두세 명이 돌려 보곤 했습니다. 그걸 읽고 함께 모여 그 감동을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지금도 그 아름다운 문장과 내용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교수님은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혔었습니다. 책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 줄 것을 미처 모르셨지요?

A. (웃음) 그 책을 탈고하고 61년에 1년 동안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국제전화도 원활하게 못하고 편지나 겨우 할 때였으니 저는 잘 몰랐지요. 미국에서 돌아오니 갑자기 유명해져있더라고요. 그 책이 내 생애의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그 해 출판연감을 보내줬는데 출판 역사에서 처음으로 비소설 분야의 책이 소설보다 많이 나갔고, 역대 최고 출판 부수를 기록한 책이라고 나와 있더라고요.
그 책은 사실 제자들을 위해 쓴 것이었어요.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아이들을 위해 좋은 교육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정렬을 쏟았어요. 그러다가 연세대학교로 옮기니까 잘 따르던 아이들을 두고 온 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 아이들이 대학 1, 2학년 되었을 무렵에 아이들을 위해 글을 써보자 해서 낸 책이었지요. 그 나이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은 내 글을 읽으면서 다감함과 뭔가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Q. 그 책은 어렵던 시절, 우리 사회에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젊은 시절의 신앙과 포부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한 기억을 말씀해 주시지요.

 

 

 

 

 

 

 

 

 

 

 

 

전쟁 속 교리싸움, 큰 실망

A. 젊어서는 신앙 가진 자로서 어떤 길이 최선일까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그때는 대다수가 신앙을 위해 택하는 가장 좋은 길로 신학 공부해서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기독교 정신, 그리스도의 뜻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꼭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일본의 무교회주의가 성행했어요. 교회냐, 기독교 정신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우선 기독교 정신을 확립하고 교회로 가든지 다른 것을 하던지 해야겠다고 방향을 잡았어요.
그런데 내 인생에서 또 한 가지 큰 전환을 가져온 것이 6.25였어요. 부산에 피난 가 있을 그때가 전쟁 중에 가장 어려운 시기였어요. 일반 시민들은 모르지만 우리 정부나 군부에서는 공산군이 부산까지 점령하게 되면 희생당할 군경가족을 오키나와로 옮겨 보호해야겠다, 그리고 크리스천을 제주도로 보내 보호한다는 계획까지 다 세우고 있을 정도였어요.

그때 장로교가 기독교장로교와 예수교장로교로 나누어지는 총회가 부산에서 있었어요. 하루는 국제시장을 쭉 돌아서 중앙교회 옆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아는 장로 한 분이 나를 보더니 “김 선생님, 여기입니다” 하고 불러요. 바로 그때 그 교회에서 총회가 열린다고, 방청하러 온 것 아니냐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지 않게 들어가 2층에서 지켜보는데 전국을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예배 잘 드리고 성 총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도 다 하더니 엄청나게 싸우는 게 아니겠어요. 그 모습을 보다가,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나라가 공산권에게 무너질 판인데 이건 정말 아니다, 저렇게 되면 교회는 희망이 없다 싶었지요. ‘기독교가 저렇게까지 무책임해졌나.’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중에 나왔어요. 이건 아니다, 아니다… 고개 저으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큰 음성이 들려왔어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례 지내게 하고 너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와라.’ 하늘이 맑은데 어디서 이런 천둥 같은 소리가 나나 해서 너무 놀랐어요. 그때 깨달은 게 ‘아, 저 사람들은 장례 지낼 사람들이구나. 내가 거기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교회 안에서 그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실질적으로 교회를 떠나는 계기가 됐어요.

Q. 그 후에 한국교회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지만 오늘에는 성장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아요.

A. 그 후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교회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 밖에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신학교 갈 생각이나 목사 되겠다는 생각도 접었지요. 그 사건이 내가 평신도로 머물러야겠다고 결심한 상당히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평신도의 삶을 결심하면서 기독교 정신이 교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문제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하는 일본인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일본에 대표적인 크리스천이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교회 안 나가는 아이들인데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같은 이가 대표적 크리스천이 아니겠는가 하더라고요. 그는 신학자나 목사가 아니라 성서주이자이면서 무교회주의자였지만 일본 계몽에는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기에 인정하는 거예요.

그 후 1960년대에 또 한 번 일본에 가서 일본 정치, 사회 계통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다가 일본에 존경받을 만한 크리스천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모인 사람들이 동경대 총장이었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 교수를 말하더라고요. 그 역시 우찌무라의 제자였거든요. 일본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은 목사거나 신학자여서가 아니라 역시 일본을 움직여준, 일본에게 생명을 준 평신도였구나 싶었어요. 한국에도 평신도다운 평신도가 있어야겠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럼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일이 뭔가 하고 보니 교회와 사회의 중간 역할이 필요하겠다 해서 지금도 쓰는 글이나 강연하는 것도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내용은 강연이지만 내가 암시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에요.

종교는 일종의 권위 때문에 생긴 건데, 목사나 신부들이 자꾸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권위를 나눠가지려 해요.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지요. 그러나 권위는 내가 차지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신앙의 권위는 예수님의 사랑을 내가 받았기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그 사랑에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뭘 하고 살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권위가 있는 거예요. 성도의 이름도 모르면서 교회만 크게 짓는 건 교회가 아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줄 수가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자꾸 교회가 걱정스러워요.

 

기독교 정신 살려내야

Q.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A. 1972년 여름에 종교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세계 종교를 찾아다녔어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가서 주일날이 되어 예배드리러 오전 11시에 루터교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은 5명이나 와서 예배 안내하려고 있는데 모인 교인은 20명이 안 됐고, 그 중에 내가 제일 젊더라고요. 예전엔 위아래 층이 가득 찼던 교회인데 그렇게 되었다더군요.

그 다음 주일은 영국 런던에 가서 예배드리는데 거기는 중심 예배가 오전이 아니고 저녁에 30명쯤 예배드리더라고요. 그날 광고가 오늘 예배를 끝으로 교회 문을 닫는다는 겁니다. 목사님께 물으니 교인들이 모이지 않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 세계가 그렇게 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교회가 사회에 줘야 할 걸 못 주니까 그래요. 한국교회도 사회에 주지 못하고 있어요. 교회가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 정신이 사느냐의 문제예요. 교회는 외형을 키우는 데 주력해서는 기독교 정신을 살릴 수 없다고 봅니다. 기독교 정신을 교회 안에서도 살리고 교회 밖에서도 살려야 해요.

세상의 기준으로 했다면 디베랴 바닷가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이젠 됐다, 이만큼 모였으니 우리가 세력을 만들자고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다 보내셨어요. 교회는 정치하는 사람이 와서 새로운 신앙으로 정치하고, 기업하는 사람도 새로운 신앙으로 기업을 일구고, 교육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정신으로 교육할 수 있게 일꾼을 키워주는 곳이지 많이 모여서 우리끼리 재밌게 살자 하는 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식이면 우리 사회의 교육 수준이 높아질 때 예배당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Q. 말씀 중에 구라파나 미국의 교회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들은 연륜 자체가 1천년이나 1500년 정도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정착되고 체질화 돼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 속에 흩어져 나가 살아도, 교회가 애벌레 빠져나간 껍데기처럼 되었어도 일종의 생명 발전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한국교회는 연륜이 짧은데 벌써 흔들리는 양상을 보이니 참으로 걱정됩니다.

A. 얼마 전 독일 메르켈 총리가 한 나라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손님으로 가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망하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건 그의 정신적인 배경이 기독교였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불란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불란서 혁명기에 대한 만화가 실려 있는 걸 봤어요. 바짝 마른 농부가 진 지게 위에 한 피둥피둥하게 살찐 사람이 타고 있는데 그가 왕족, 귀족, 신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농부가 어떻게 견디겠어요.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가들이 주장한 것은 자유, 평등, 박애였어요. 그건 기독교 정신이거든요. 그렇게 기독교 정신은 사회 속에서 꽃피운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 위에서만 이뤄지는 거지 하늘 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된 핵심 역시 희랍정교회의 부패였습니다. 먹을 거 없고 가난한 농부들이 교회 가서 우리를 살려 달라 할 때 안 도와주고 십일조만 요구했어요. 그러니 누가 교회에 가겠습니까.
지금도 교회가 예수님 당시 지도자들이 율법과 계명만 이야기했듯이 자꾸 교리만 가지고 말하는데 세상은 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 지인이 ‘왜 스님들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나오는데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안 나오느냐’고 묻더라고요. 목사님들은 교리를 말하지만 스님들은 인생을 이야기했어요.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건 진리를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교리, 율법, 계명을 넘어 진리를, 하늘나라만을 말씀하셨어요. 교회가 진리는 얘기하지 않고 율법과 교리만 말하니 세상이 버리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주의에 빠져 안일하게 사는 유형들은 지성이 발달되면 다 버림받아요.

한국 기독교는 길어야 200년 역사고 불교, 유교는 500년 역사예요. 사실 우리 밑바탕에 흐르는 것 가운데 기독교정신보다 불교, 유교적인 인생관이 많습니다. 뿌리까지 바뀌려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가졌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인생관과 가치관이 되었는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에서 들은 얘기일 뿐 나의 가치관이 되지 않았다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을 내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삼고 사는 것, 그것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놓치고 있지요.

그걸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뭐가 다른가? 그걸 가진 사람은 예수 믿으라고 전도 안 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만 그걸 못 가진 사람은 아무리 예수 믿으라고 해도 인생관이 다르다며 거리감을 느낍니다. 목사님이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이 내 인생관과 가치관이 되게 해주면 기독교가 사회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뇌가 내 고뇌

Q. 시대가 어수선한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인물에 대한 갈망이 큰 것 같습니다. 저는 신라 불교의 원효를 주목해서 보고 있습니다. 원효가 신라 불교 200년 남짓 됐을 때 등장했는데, 그분은 일본이나 중국, 신라 불교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불교 역사 200년만에 원효 같은 인물이 나온 한반도라면 우리 기독교에도 인물이 나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A. 원효를 말씀하셨는데요. 그분은 석가님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고민, 탐구하려는 자세를 거의 같은 위치에서 찾아간 것 같아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역시 예수님과 같은 문제의식, 같은 인간애, 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예수와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봐요. 예수님이 가르쳤던 고뇌가 내 고뇌고, 그 기도가 내 기도고,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일을 조금이라도 같은 선에 서서 함께하려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나고 각계각층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가서 내 신앙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신 말씀이 그것이 아닐까요.
아는 분이 천주교 신자였는데 불교로 갔어요.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하는 말이 예수님의 생애나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석가님의 마음이 훨씬 넓었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인가 하니, 예수님은 욕하기도 좋아하고 남을 때리기도 했지만 석가님은 그런 것 없이 포용하는 것이 좋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말이 맞지만 석가님은 인간의 역사와 고민에 대해서는 책임을 안 졌다고 대꾸했어요. 석가님은 가르치기만 하고 자기만 열반에 올라갔지만 예수님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는 겁니다. 자신을 버리셨잖아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더 인간적이었고, 석가님은 너무 높았다고 이야기해서 함께 웃었습니다. 원효 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적지만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는 김교신 선생이 진정한 크리스천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김교신 선생님이 <성서조선>을 할 때 당시 전국의 독자가 300명이었다고 해요. 고등계 형사들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던 때에 독자 300명이면 대단한 것이었지요. 그때 형사들이 하는 말이 독립운동가들보다 너 같은 놈들이 겁난다고 하면서 책을 뺏어갔다고 해요. <성서조선> 그룹들이 지금도 그 뿌리와 신앙 족적을 뚜렷하게 지켜가고 있거든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A. 그분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예수를 떠나서는 더 귀한 것, 더 높은 것이 없다는 게 몸에 뱄던 것 같아요. 진정한 크리스천에게는 공통된 두 가지를 발견하게 돼요. 교회보다는 민족과 국가를 더 걱정하는 것이에요. 좀 미안한 얘기지만 교회보다 민족과 국가를 더 걱정할 줄 모르는 목사나 신부는 존경스럽진 않아요.
또 하나 공통된 점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안다는 점이에요.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사회는 그런 사람을 원하거든요. 제 지인 중에도 불교로 말하면 작은 원효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하나의 즐거움이고 희망입니다. 그런 마음들이 늘어나면 원효 같은 큰 인물을 낼 정신적 바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강원도 양구에서 저와 안병욱 선생을 기념한다고 해서 자그마한 기념관을 하나 만들었어요. 우리도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게 소설가나 화가, 시인은 기념관이 생겨도 철학하는 사람의 기념관이 생기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안 선생이나 저나 탈북자거든요. 양구에서 이분들은 고향이 없으니까 우리가 묘소도 만들어드리고 기념관도 짓자 해서 이뤄진 거였어요. 그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외람되지만, 탈북해 온 사람과 여기 쭉 산 사람과 다른 점이 있어요. 안 선생이나 저는 만나면 내 걱정, 학교 걱정보다 나라 걱정을 먼저 해요. 대한민국에 대해서 정말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거든요. 누가 뭐라 하든 내가 대한민국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하는 고마운 생각이 우리에겐 늘 있었어요.

Q. 네, 교수님의 말씀대로 희망의 미래가 열릴 것을 기대해 봅니다. 한 가지, 교수님의 표현 중에 스스로를 ‘탈북자’라고 하셨는데 6·25 이전에 내려오신 경우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탈북자’라고 하시니 통일 문제에 더욱 관심이 크실 텐데요. 한국교회의 현안 가운데 하나가 교단 난립입니다. 통일시대에는 북한에서만이라도 단일교단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A. 현재 한국교회 수준으로는 한 50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일찍 병들어 살림 봐주시는 아주머니를 두었는데, 앞서 두 분이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참 즐겁게 일하셨어요. 그런데 세 번째 온 분은 기독교인기에 주일이면 교회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잘 되었다고, 그러시라고 했어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왔으니 좋다 했는데 같이 있어보니 안되겠어서 결국 그만두도록 했습니다. 대형교회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교회 안 나와도, 헌금 많이 못 해도 죄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죄라고, 그 책임은 꼭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좋아질 겁니다.
 

북한의 변화 기다리는 인내 필요

Q. 말씀하신 대로 50년쯤 통일이 늦춰지더라도 남쪽의 의식이 성장한 후에 북한 땅에 더 좋은 기독교가 형성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는 북한과 남한의 통일이든지 연방정부든지 관계 개선이 되어야 할 텐데요. 통일에 대한 교수님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지요. 세계 역사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이 없어지고 상대적인 사고방식으로 한번 바뀌어야 하고, 상대적 사고방식이 다원주의 사고방식으로 한 번 더 열릴 때가 되면 다 해결될 겁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북한 문제를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자는 겁니다. 냉전시대, 절대주의 시대에는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가 살아남느냐 아니면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가 살아남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때였어요. 어느 하나가 없어져야 한다는 게 절대주의입니다.

그런데 냉전시대가 지나니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상대주의로 발전했어요. 보수와 진보가 같이 있어야지 어느 하나를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까지 나아간 겁니다. 그보다 더 발전한 게 21세기에 와서 다원사회로 발전했지요. 그걸 성공시킨 사회가 미국이에요. 구라파도 미국처럼 다원사회를 향해 가고 있어요. 미국과 유럽이 다원사회가 되고 이어서 아시아도 그리 되면 그때는 남북한 문제도 풀릴 거라고 봅니다. 북한의 절대주의가 바뀌고 상대주의 공동사회로 가는 과정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Q. 오랜 시간 말씀하셨는데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으십니다. 놀랍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한 고민이 많이 해소되는 듯합니다. 교수님께서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거뜬하실 것 같습니다.

A. (웃음) 2년만 더 이렇게 일할 수 있길 기대할 뿐입니다.
Q. 그럼 2년 간 보완 또는 새롭게 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A. 창조적인 사고방식은 70대 중반쯤이면 다 끝나는 것 같아요. 70대 중반에서 80세까지 축적했던 생각을 사회에 나눠주는 거죠. 그거 나눠주는 동안이 한 2년쯤 더 남은 것 같습니다.

Q. 감사합니다. 말씀 속에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사회와 교회에 귀한 가르침을 오래도록 나눠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리=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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